
국민연금의 미적립부채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지난 14일 국회 연금개혁특위 민간자문위원회 1차 회의에서 일부 위원들이 미적립부채를 공식 지표로 공개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회의가 비공개로 진행되면서 투명성 논란도 함께 확산됐다. 회의에서는 현 제도대로 갈 경우 2050년 미적립부채가 최대 5541조원에 달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시됐으나, 핵심 논의가 제한적으로만 공유됐다.
미적립부채는 현재 적립된 기금보다 미래에 지급해야 할 연금 총액이 더 많을 때 발생하는 부족분을 뜻한다. 이는 현재 갚아야 할 빚은 아니지만 미래세대가 보험료나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 잠재적 부채로 해석된다. 국민연금연구원은 2021년 기준 1735조원, 국회예산정책처는 올해 개정법을 반영해 2024년 말 기준 1820조원으로 각각 추산한 바 있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단일 공식 지표가 마련되지 않아 기관별 산출 방식과 추정치가 뒤섞이며 국민이 정확한 재정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논란의 본질을 개혁을 제때 추진하지 못해 부채가 누적된 구조적 문제에서 찾고 있다. 핵심 재정지표조차 공개에 소극적인 관행이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연금 재정의 가장 구조적인 병목으로 꼽히는 부분은 보험료율 인상 시점의 반복적 실패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1차 개혁 전에는 제도 도입 초기인 1988년 이후 9%에서 단 한 차례도 조정되지 않았다. 그 사이 기대수명은 늘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보험료율은 거의 40년 가까이 고정돼 재정조정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연금재정추계 결과와 국회예산정책처 등의 분석에서도 보험료율 인상 시기를 늦출수록 이후 필요한 인상 폭이 커진다는 점이 반복해서 제기돼 왔다. 하지만 정치권은 부담 논란을 우려해 결정을 반복적으로 미뤄왔다. 결국 여러 번 조금씩 올릴 기회를 놓친 채, 지금은 큰 폭의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에 들어섰다는 평가다.
14일 회의에서는 올해 국회를 통과한 1차 모수개혁에 대한 평가도 극명하게 갈렸다. 한 위원은 보험료율 9%에서 13%, 소득대체율 40%에서 43%로 조정된 개혁안을 두고 개혁을 가장한 개악이라고 비판했다. 이 위원은 개정 이후 기금 소진 뒤 매년 부담해야 할 부과방식 보험료율이 36.6%에서 39.4%로 오히려 높아져 미래세대 부담이 더 커졌다고 지적했다. 반면 다른 위원들은 재정 안정과 보장성 간 균형을 고려할 때 추가적인 소득보장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개혁의 방향성을 놓고 시각차를 드러냈다.
미적립부채 공개를 둘러싼 시각 차이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공개를 주장하는 쪽은 1차 모수개혁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정확한 재정 상황을 국민이 알아야 2차 구조개혁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1700조원대에 달하는 숨겨진 부채의 실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만 수급 연령 상향, 기금운용 방식 개편 등 근본적인 개혁 조치를 설득할 수 있다는 논리다. 반대 측은 미적립부채 자체가 국민연금의 사회적 약속이라는 특수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지표라는 입장이다. 미래 가정에 따른 계산값을 실제 부채처럼 제시하면 공포만 조장하고, 결국 2차 구조개혁 논의를 혜택 축소 중심으로만 몰아갈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다. 이들은 이미 1차 모수개혁에서 재정 안정과 보장성 사이의 절충이 이뤄진 만큼, 지금 시점에서 미적립부채를 전면에 내세우는 접근은 균형을 훼손한다는 입장이다.
공개 주장 측은 미적립부채가 국제적으로도 활용되는 지표라며 반박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도 장기 재정 평가에 활용하는 만큼, 국내 논의에서 이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 6월 국민연금법 개정의 재정 효과를 분석할 때도 미적립부채를 주요 지표로 사용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한 연금정책 전문가는 미적립부채 논란은 숫자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개혁 지연이 만든 구조적 불신의 문제라며 핵심 재정지표를 제때 공개하지 않으면 사회적 신뢰는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연금특위 내부에서 회의 생중계와 자료 전면 공개 요구가 나온 것도 같은 이유라며 국민연금이 국가적 사회계약인 만큼 재정지표의 투명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지금 필요한 것은 공포를 자극하는 숫자가 아니라 투명한 공개와 책임 있는 의사결정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