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등은 꺼지지 않았다.
응급실 천장을 가로지르는 붉은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다. 피가 마르다 못해 벽에 스민 것 같은 색이었다. 그 아래에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침묵은 점점 무게를 얻었다.
세온은 트리아지 구역 벽에 기대 앉아 손목 안쪽 멍을 눌렀다. 아픔은 분명했지만, 정신을 다른 데로 돌려 주지는 못했다. 자동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고, 바깥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한 재난은 늘 더 나빴다.
응급실 안에 남은 건 여섯 명이었다.
정확히는, 스스로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여섯 명이었다.
침대 쪽에는 링거를 단 노인이 누워 있었고, 입구 의자에는 다리를 붕대로 감은 중년 남자가 신발 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세온은 그 둘을 힐끗 보고 시선을 거뒀다.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누구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버틸 수 있는 사람과 버티지 못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자원부터 봐야 해요."
세온이 일어서며 말했다.
제안이라기보다 정리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먼저 말을 꺼내야 했다.
강태민은 처치실 쪽에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어깨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이미 혼자 한 바퀴 돌고 온 얼굴이었다.
"처치실 안에 링거 열네 개, 소독제 두 통, 장갑 한 묶음."
그가 짧게 말했다.
"먹을 건 없고."
세온이 눈썹을 찌푸렸다.
"혼자 확인했어요?"
"늦으면 의미 없으니까."
툭.
말은 짧았고, 맞는 말이라 더 거슬렸다.
세온은 대꾸하지 않고 차유리 쪽으로 갔다. 유리는 응급 키트를 펼쳐 놓고 목록을 다시 적고 있었다. 빨간 볼펜 끝이 말라 종이를 긁는 소리만 났다. 그녀는 펜을 한 번 털고 다시 눌러 썼다.
"41번 침대."
세온이 물었다.
"어때요?"
유리가 잠깐 멈췄다.
"산소포화도 89."
그녀가 낮게 말했다.
"떨어지기 시작하면 빨라요."
"산소통은요?"
"하나. 20퍼센트 남았어요."
그 말 뒤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리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이미 계산을 끝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누구에게 쓸지, 얼마나 버틸지, 그다음이 있는지 없는지.
세온은 그 표정을 오래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린은 구석에서 태블릿 화면을 옷자락으로 반쯤 가린 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온의 시선이 닿자 재빨리 화면을 눕혔다.
"봉쇄망 다시 보는 중이에요."
하린이 먼저 말했다.
"아까 그 지도요."
"뭐가 달라졌어요?"
"확정은 아닌데… 방송 경계선보다 실제 봉쇄선이 더 안쪽이에요. 한 블록쯤."
세온의 눈빛이 굳었다.
안내방송은 바깥을 넓게 비우라고 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더 좁게, 더 급하게, 더 은밀하게 조여 오고 있었다.
누가 거짓말을 한 거지.
방송이, 아니면 현장이.
오도혁은 자동문 유리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문 너머는 칠흑 같았다. 그는 휴대폰을 쥔 채 화면은 보지도 않고 엄지로 아래쪽을 두드리고 있었다.
짧게.
짧게.
길게.
세온은 그 손가락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강태민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시선이 잠깐 부딪혔다.
말은 없었지만 뜻은 같았다.
저건 불안해서 만지작거리는 손이 아니다.
정윤호는 처치실 벽에 떨어져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남들 대화에 끼지 않으면서도 다 듣고 있는 사람의 자세였다. 세온은 그가 너무 일찍 자기 신분을 꺼냈던 걸 떠올렸다. 구청 재난안전과라고, 묻기도 전에.
그런 사람은 대개 둘 중 하나였다.
정말 겁먹었거나.
아니면 그 말로 다른 걸 가리려 하거나.
그때 하린이 아주 작게 숨을 삼켰다.
세온이 시선을 따라가자, 정윤호가 겉옷 안쪽에 손을 넣었다 빼는 순간이었다. 손바닥 안에서 금속성 빛이 한 번 번쩍였다. USB쯤 되는 크기였다. 그는 곧장 그것을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팔짱을 꼈다.
세온은 묻지 않았다.
지금 건드리면 더 깊이 숨길 게 뻔했다.
대신 기억해 뒀다.
누가 무엇을 숨기는지는 밤이 길어질수록 결국 몸이 먼저 말하게 된다.
"출구를 더 확인해야 해요."
세온이 중앙으로 돌아와 말했다.
이번에는 강태민을 똑바로 봤다.
"처치실 뒤 서비스 통로는요?"
"외부 셔터 내려왔어."
"안에서 못 열어요?"
"공구 없으면 힘들어."
"공구 없는 건 확인했고요?"
강태민이 세온을 봤다. 눈빛이 잠깐 날카로워졌다가 곧 가라앉았다.
"아니."
세온은 그대로 처치실 안으로 걸어갔다. 강태민도 따라왔다. 나란히 걷는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간격이 있었다. 서로 등을 맡길 사이는 아니고, 그렇다고 등을 보일 수도 없는 거리였다.
서비스 통로 셔터는 끝까지 내려와 있었다. 세온은 손전등을 켜 바닥 틈을 비췄다. 틈은 손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그런데 먼지가 이상했다.
셔터 바로 아래 바닥의 먼지가 양옆으로 밀려 있었다. 오래 닫힌 문 밑에 생길 모양이 아니었다.
세온이 쪼그려 앉았다.
"이거, 최근에 움직였어요."
강태민도 몸을 낮췄다. 손끝으로 셔터 아랫면을 훑더니 손가락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기름 냄새였다.
아주 옅지만 분명했다.
태민의 턱이 굳었다.
"누가 손질했네."
그 한마디에 세온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밖에서 잠근 것만이 아니었다.
이 병원 안 어딘가를 드나든 사람이 있었다. 최근까지.
둘이 처치실에서 나오자마자 차유리가 일어섰다. 이번에는 얼굴이 달랐다. 침착하려고 애쓰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41번, 떨어져요."
유리가 말했다.
"83까지 내려갔어요."
응급실 안 공기가 순간 멎었다.
노인의 거친 숨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규칙적이지 않았다. 한 번 들이쉬고, 한 번 놓치는 소리였다.
유리는 산소통 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연결하면 한 시간 남짓이에요."
그녀가 세온을 봤다.
"그 뒤는 없어요."
그건 의료진의 보고가 아니었다.
누가 여기서 첫 결정을 내릴 거냐는 질문이었다.
세온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머릿속에서 숫자가 지나갔다. 한 시간. 노인 한 명. 남은 다섯. 아니, 여섯. 아직은 여섯이었다.
"연결해요."
세온이 말했다.
"지금은 살릴 수 있는 쪽으로 가요."
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움직였다. 망설임이 없어서 오히려 더 무거웠다.
그때 오도혁이 자동문에서 몸을 떼고 천천히 걸어왔다.
"근데요."
그가 말했다.
"우리 지금 구조를 기다리는 겁니까, 탈출 준비를 하는 겁니까?"
세온이 그를 봤다.
"왜요?"
"기다리는 거면 난 다른 계산을 해야 해서."
강태민이 한쪽 어깨를 돌리며 섰다. 당장이라도 끼어들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입은 다물고 있었다.
오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근처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길 아는 사람."
"이름."
세온이 곧장 물었다.
오도혁의 웃음이 반 박자 늦었다.
"그건 나가게 되면 말하죠."
"그럼 없는 거네요."
세온이 잘라 말했다.
오도혁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사람 몰아붙이는 취미 있어요?"
"거짓말 싫어하는 취미는 있어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순간 강태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다음부터 손가락으로 신호 보내듯 휴대폰 두드리지 마."
낮은 목소리였다. 더 무서운 종류의.
"불안한 척도 적당히 해야지."
오도혁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요?"
"들었잖아."
둘 사이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하린이 숨을 죽였고, 정윤호는 여전히 벽에 기대 선 채 눈만 움직였다. 차유리는 산소 마스크를 노인 얼굴에 씌우면서도 귀를 세우고 있었다.
세온은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대신 한 발 앞으로 나와 오도혁을 똑바로 봤다.
"여기서 혼자 빠져나갈 생각이면, 지금부터는 숨기지 마요."
오도혁이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혼자 살 궁리하는 게 죄예요?"
세온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붉은 비상등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요."
세온이 말했다.
"근데 남을 밟고 먼저 나가려는 사람은 제일 먼저 문 앞에서 죽어요. 이런 데선 늘 그랬어요."
말이 떨어지자 응급실 안이 더 조용해졌다.
오도혁은 한동안 세온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완전히 꺾인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더 밀어붙일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 얼굴이었다.
강태민은 세온을 한 번 봤다. 짧고 무뚝뚝한 시선이었지만,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적어도 방금만큼은 같은 편처럼 보였다.
노인의 가슴이 산소 마스크 아래서 조금 더 크게 들썩였다. 기계음이 약하게 이어졌다. 한 시간을 산 셈이었다.
하지만 그 한 시간은 공짜가 아니었다.
하린은 다시 태블릿을 켰고, 봉쇄선은 여전히 방송보다 안쪽에 있었다. 정윤호의 안주머니는 여전히 불룩했다. 서비스 통로 셔터에는 최근 기름칠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자동문 바깥, 새까만 유리 너머 어딘가에서.
툭.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문을 한 번 건드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