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분위기가 묘했다. 서하는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자마자 도윤이 눈을 굴리는 걸 봤다. ‘또 뭔가 잘못된 건가.’ 손이 덜컥 떨려, 뚜껑 없는 테이크아웃 컵에서 미지근한 브라운 액체가 책상 위로 쏟아졌다. ‘아, 제발…’
“서하, 고객 자료실 정리한 거 확인했는데—”
도윤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서하가 손수건을 꺼내 테이블을 훔쳤다. 빨리 닦아야 한다. 빨리, 빨리, 빨리. 커피 자국보다 더 무서운 건 도윤의 ‘그 눈’이었다. 조용히 깎는 시선. ‘조금만 더 안정적으로… 조금만 더.’
“괜찮아요, 선배. 제가 바로 처리할게요.”
도윤은 한숨을 쉬고 말없이 자료를 내려놓았다. 그때, 건물 입구에서 뭔가 움직였다. 허리 굽은 등, 흰 반팔 티에 낡은 모자를 쓴 남자. 눈에 익은 실루엣. 서하의 손이 멈췄다.
“저기… 실례하는데요. 윤서하 씨 어디 계세요?”
사무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수진은 모니터를 보는 척, 지우는 커피를 너무 오래 저었고, 도윤은 마치 산업 폭발이라도 예견한 듯 고개를 슬쩍 돌렸다. 서하는 심장이 입까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아, 아버지… 왜요?”
아버지는 대답 없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허름한 편지 봉투. 봉을 뜯지 않은 채로, ‘보상신청’이라는 제목이 프린터로 찍혀 있었다.
“병원비 나왔대. 이거 처리 좀 해줘.”
서하는 얼어붙었다. 아버지가 보험 서류를 들고 회사에 올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이 병원비가 정신과라는 걸 알 리 없다. 아버지가 아들한테 ‘정신’이 안 좋다는 뜻이라도 되는 양 말할까 봐. 그건 아버지가 가장 무서워할 일이었다.
“아빠… 여기서 이야기할 수 없어요. 저녁에 집에서—”
“그게 뭐가 어때서. 네가 일하는 거면 되는 거 아니냐?”
그 목소리에는 억센 투가 섞여 있었다. 자존심을 붙들고 있는 소리. 서하는 혼란 속에서도 그게 아버지의 ‘도와줘’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곳은 그의 직장이었다. 도윤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고, 수진은 조용히 다가와 손을 뻗었다.
“서하 씨, 제가 잠깐 나와서 설명해 드릴까요?”
“괜찮아요, 제가—”
“아무리 딸이라도, 절차는 절차니까요.”
수진의 말은 차분했지만, 날카로움이 감돌았다. 아버지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며 분위기를 느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나갈게. 안 왔어야 했나 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서하는 눈가가 따끔했다. 아버지가 돌아서는 뒷모습이 유난히 작게 보였다. 몇 년 전,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일자리를 잃고도 ‘괜찮다’ 했던 때와 같은 자세였다. 아프지 않다고, 병원 가지 않겠다고, 아들한테 짐 안 되겠다고.
“아버지, 잠깐만—”
서하가 따라 나가자, 아버지는 건물 계단 앞에서 신문지로 싸온 도시락을 꺼내고 있었다. “회사 밥은 비싸다며. 네가 뭐 하느라 바쁘면 나는 알아서 하면 되지.”
그 말에 더 화가 나야 할 텐데, 서하는 웃음이 났다. 억지로, 슬픈 웃음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점심도 훔쳐오듯 먹고, 아픈 건 숨기고, 걱정은 ‘서하가 바쁘니까’라는 말로 덮는다.
지우가 문을 사이에 두고 손을 흔들었다. “형, 여긴 비어도 되는 공간 아닙니다.”
아버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래, 가면 돼” 하고 일어났다.
서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봉투를 꼭 쥐었다. 이 서류는 보험 처리보다 먼저,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낼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는 ‘딸이 나 때문에 번거롭게 됐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퇴근 후 서하는 병원으로 갔다. 아버지가 제출한 진단서를 보며, 보험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이번 정신건강 치료 관련 청구, 제 이름 좀 숨겨주실 수 있을까요?”
전화 건너편에서 잠깐 정적이 흘렀다.
“…혹시 가족이세요?”
서하는 잠깐 망설였다. “네. 근데 아버지가 알면 더 힘들어하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대신, 다음엔 가족도 보험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아프다고 부끄러워하는 세상이 더 아픈 법이니까요.”
그 말을 듣고, 서하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무뚝뚝한 건, 아픈 걸 말 못 해서가 아닐까. 그리고 내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 때문은 아닐까.
그날 밤, 아버지에게 온 문자 하나.
‘밥 사가. 기름진 거로.’
서하는 웃으며 전화를 걸었다. “기름진 거는 안 먹는다며?”
“그래도 딸이 사는 거면 괜찮지.”
전화 끊고, 서하는 책상 위에 놓인 아버지의 봉투를 다시 펼쳤다. 그 안에는 병원 외래 카드와,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서하가 어릴 적, 아버지 등에 업혀 공사장을 구경하던 날. 두 사람 다 웃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큰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