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보상팀 사무실은 라면 냄새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한지우가 강도윤의 커피에 설탕 세 알을 몰래 털어 넣고는, 무슨 대형 프로젝트라도 발표하듯 컵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심장 강화 프로젝트입니다. 오늘부터 선배님도 인간적인 단맛을 좀."
윤서하는 웃음을 참다가 결국 배를 잡았다. 의자 바퀴가 뒤로 밀리며 끼익 소리를 냈다. 민수진은 서류를 보던 얼굴 그대로였지만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고, 강도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멈췄다.
정적.
"왜요, 선배님. 세상이 좀 달아졌죠?"
한지우가 눈을 반짝이자 강도윤은 컵을 책상 끝으로 조용히 밀어 두었다.
"업무 방해로 기록하겠습니다."
"와, 설탕 세 알에 징계라니. 회사가 너무 쓰다."
그 말에 윤서하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웃었다. 오전 내내 잔뜩 굳어 있던 어깨가 그제야 조금 풀렸다. 첫 현장 이후로 계속 몸 어딘가에 힘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 틈에 끼어 있으니 이상하게 숨이 쉬어졌다. 정말 괜찮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하지만 보상팀의 점심은 늘 짧았다. 오후 두 시가 되자 사무실 공기는 금세 바뀌었다. 전화벨이 겹쳐 울리고, 키보드 소리가 빗소리처럼 이어졌다. 응대석 앞 대기 줄도 금방 길어졌다. 윤서하는 모니터 옆에 붙여 둔 메모를 한 번 훑고,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아직도 민원인 앞에 앉으면 목 안쪽이 먼저 바짝 말랐다. 조금 전까지 웃던 얼굴을 접고, 다시 기준과 절차의 얼굴을 꺼내야 하는 곳. 그게 보상팀이었다.
맨 앞에 선 할머니는 연노란 우산을 꼭 쥐고 있었다.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우산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손잡이를 몇 번 쓰다듬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딸아이 주려고 사 온 건데…… 막상 쥐고 오니까 눈물이 나더라."
윤서하는 순간 입을 열지 못했다. 준비해 둔 안내 문구가 머릿속에서 싹 흩어졌다. 뒤에서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만 괜히 또렷하게 들렸다. 할머니는 그 짧은 침묵을 민망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먼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내가 별소릴 다 하지. 그냥 되는 것만 안내해 줘요."
되는 것만.
그 말이 이상하게 더 아프게 들렸다. 윤서하는 급히 서류를 확인했다. 기준은 분명했다. 처리 가능한 항목과 아닌 항목도 명확했다. 외워 둔 문구를 조심스럽게 꺼냈지만, 말끝이 자꾸 걸렸다.
"이 부분은 접수가 가능하시고요. 다만 지금 말씀하신 비용은…… 현재 기준상 바로 반영되기 어렵습니다. 추가 확인 서류가 있으면 다시 검토는 가능한데……"
자기 목소리가 너무 얇게 들렸다. 강도윤이 옆에서 차분하게 필요한 부분을 정리해 설명했고, 민수진은 서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누구 하나 무성의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기준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윤서하는 그 사실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웃는 얼굴을 지켰다. 다만 목소리 끝이 조금씩 떨렸다.
"햇빛이 너무 강해서…… 그 아이 얼굴도 제대로 못 보겠더라."
사무실 안 공기가 잠깐 멎은 것 같았다. 딸이 간병 중인 병원에 가기 전까지는 이 우산을 절대 펴지 않겠다고 했다. 괜히 먼저 쓰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다고, 그래서 그냥 들고만 다닌다고 했다. 복도 쪽에 서 있던 한지우는 그 말을 듣고 잠깐 고개를 돌렸고, 민수진도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강도윤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리 가능한 부분은 안내해 드렸습니다. 추가로 확인되는 서류가 있으면 다시 접수해 주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정확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서하는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정확한 말이 꼭 가벼운 말은 아니라는 걸, 오늘은 너무 선명하게 알 것 같았다. 강도윤은 자리로 돌아가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고, 윤서하는 그제야 자신도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가 돌아간 뒤, 응대석 위에는 연노란 우산이 남아 있었다.
비닐이 바스락.
윤서하는 우산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잊고 간 건지, 일부러 두고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분실물로 넘기면 절차는 깔끔했다. 그게 맞는 순서이기도 했다. 잠깐만 두면 누군가 대신 처리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이걸 그냥 분실물 함에 넣어 버리면, 오늘 할머니가 웃으면서 삼킨 것까지 같이 밀어 넣는 기분이 들었다. 반대로 직접 찾아 나섰다가 괜한 오지랖이 되면 어쩌나 싶었다. 신입이 감정에 휩쓸린다고 보일 수도 있었다.
선택해야 했다.
윤서하는 우산 손잡이를 다시 꽉 쥐었다. 그리고 고객센터 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가 멈췄다. 대기 인원이 밀려 있었고, 자기 자리도 비울 수 없었다. 몇 초가 길게 늘어졌다. 결국 그는 접수 메모를 꺼내 또박또박 적었다. 날짜, 시간, 응대석 번호. 그리고 직접 보관.
오늘만큼은 이 우산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서랍 밖으로 밀어 두고 싶지 않았다. 규정을 어긴 건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 대신 결정해 주길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선 안에서 선택한 거였다. 그 사소한 결단 하나에 심장이 괜히 더 크게 뛰었다.
퇴근 무렵, 윤서하는 회의실 창문에 비친 자신을 잠깐 들여다봤다. 막내라서 웃고, 막내라서 실수하고, 막내라서 처음 보는 슬픔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 병원에 갈 때마다 햇빛이 무서웠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자, 한동안 외면해 둔 휴대전화가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부재중 전화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윤서하는 전화기를 꺼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걸까.
아니, 조금만 더 있다가?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하는지, 왜 전화했냐고 물어야 하는지, 아무렇지 않은 척 밥은 먹었냐고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짧은 화면 하나 앞에서 손끝이 굳었다. 걸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지금 걸면 더 서툴러질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낮에 할머니에게는 기준을 말하면서, 정작 자기 아버지에게는 한마디도 못 하겠었다.
그때 한지우가 복도에서 어깨를 툭 쳤다.
"신입아, 오늘 건 완전 타살이야."
"네?"
"네 멘탈이 타살당했다고. 근데 네가 뭘 잘못한 건 아냐. 우리도 다 그랬고, 앞으로도 자주 그럴 거야."
위로인지 농담인지 애매한 말투였다. 그런데 그 애매함이 오히려 숨통을 틔워 줬다. 윤서하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하루 종일 목에 걸려 있던 돌멩이가 아주 조금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한지우는 할 말만 하고는 이미 돌아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지우가 뒤도 안 보고 덧붙였다.
"전화는 미루면 더 무서워져. 경험담이야."
윤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장난처럼 툭 던져졌는데도,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날 밤, 최은별에게 전화가 왔다.
"너 진짜 적응 좀 되어 가는 거야? 요즘 눈빛이 덜 망설이던데."
윤서하는 대답 대신 잠깐 웃었다가, 이내 낮의 장면을 떠올렸다.
"근데 오늘, 웃는 사람한테서 슬픔이 왜 그렇게 무거운지 처음 알았어."
잠시 말이 없던 은별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제 진짜 시작이야."
위로 같기도 하고 경고 같기도 한 말이었다. 통화를 끊고도 윤서하는 한동안 화면을 내려다봤다. 아버지의 부재중 전화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한쪽에 남아 있었다.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멈췄다. 누르기만 하면 되는데, 그 한 번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에 들어선 윤서하는 걸음을 멈췄다. 강도윤의 책상 위에 연노란 우산이 놓여 있었다. 자물쇠처럼 단단히 닫힌 채였다. 분명 어제 자신이 보관 메모를 붙여 둔 우산이었다.
누가 옮겼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강도윤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서류를 넘겼고, 정리된 서류 더미 사이로 병원 영수증 한 장이 살짝 비쳤다. 병원 이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윤서하는 시선을 급히 거뒀다. 어떤 무게는 먼저 캐묻는다고 가벼워지지 않는다는 걸 어제 하루 동안 조금 배운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왜 하필 그 우산이 강도윤의 책상 위에 있는지, 왜 그 영수증과 같은 자리에서 보이는지.
그리고 그 순간, 강도윤이 고개를 들어 조용히 윤서하를 바라봤다.
"윤서하 씨."
낮고 평평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사무실 공기가 다시 팽팽해졌다. 우산 손잡이 끝에 붙은 작은 병원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분명 못 봤던 표시였다. 그걸 강도윤도 본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