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열세 분. 보상팀 사무실 형광등 세 줄 중 두 줄은 이미 꺼져 있었고, 남은 한 줄도 끝이 파르르 떨렸다. 서하는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혀를 데었다. 아, 하고 소리를 삼킨 건 옆자리에서 서류를 넘기는 도윤의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혀 데었으면 얼음 물어."
도윤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서하는 입술을 오므린 채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얼음이 어디 있어요, 라고 말하려다 그냥 삼켰다. 새벽에 사수 앞에서 투덜대는 건 아직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사건은 두 시간 전에 뒤집혔다. 민주의 세탁소 누수 건과 관련해 건물주 측이 제출한 배관 수리 확인서를 수진이 저녁 여덟 시에 메일로 넘겨왔다. 서하가 처음 읽었을 때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수리 일자, 업체명, 배관 교체 구간, 그리고 마지막 장에 찍힌 임차인 확인 서명. 민주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문제는 그 글씨였다. 서하는 민주의 글씨를 알고 있었다. 세탁소에서 접수서를 쓸 때, 볼펜을 꾹꾹 눌러 획이 뭉툭하게 번지던 그 손글씨. 확인서에 적힌 '강민주'는 너무 깔끔했다. 획이 가늘고 기울기가 일정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도윤 선배, 이거 임차인 서명란 좀 봐주실 수 있어요?"
서하가 확인서를 밀자 도윤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왔다. 종이 위에 머문 시간은 삼 초 정도였다. 도윤이 서류를 뒤집어 앞면의 업체명을 다시 확인하더니, 처음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민주 씨한테 직접 확인해 봤어?"
"아직이요. 새벽이라."
"내일 아침 첫 통화야." 도윤의 말은 짧았지만 톤이 달랐다. 평소의 건조함이 아니라 뭔가를 눌러 담는 느낌이었다. 서하는 사수의 눈이 서명란 위에 오래 머물렀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쪽 조사실로 걸어갔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따라 일어섰다. 조사실은 낮에는 민원 상담에 쓰이지만, 이 시간에는 비어 있었다. 형광등을 켜자 흰 벽이 눈에 찔렸다. 도윤이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배관 업체가 수리 끝나고 임차인 확인을 받았다고 했지. 근데 민주 씨가 그날 세탁소에 없었을 가능성은?" 도윤이 보드에 날짜를 적었다. 수리 확인서상 날짜는 지난달 22일이었다. 서하는 수첩을 꺼내 뒤졌다. 민주가 서하에게 처음 전화를 건 날. 누수가 재발해서 세탁물이 다시 젖었다고 울먹이던 그 전화.
"22일이면…… 민주 씨가 딸 학교 상담 갔다고 했던 날이에요. 오후에 가게 비웠다고."
도윤의 펜이 멈췄다. 보드 위에 '부재 — 누가 서명?' 이라고 적힌 글씨가 형광등 아래 또렷했다. 서하의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서명이란 게 그렇다. 종이 위에 이름 석 자를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 초도 안 되지만, 그 한 줄이 없으면 권리가 사라지고, 있으면 책임이 생긴다. 그리고 본인이 쓰지 않은 서명은 — 서하는 떠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도윤의 책상에서 사라진 수진의 포스트잇이 머릿속을 스쳤다.
"업체 쪽에서 건물주한테 보고할 때 임차인 서명 필요하니까, 현장에 있던 누군가가 대신 써줬을 수도 있고." 도윤이 말했다. 보드를 보는 척했지만 눈은 서하를 향해 있었다. "문제는 민주 씨가 동의했느냐야. 대리서명이 사전에 명확한 위임 없이 이루어졌으면, 이 확인서 자체의 효력이 흔들려."
서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이 마르는 걸 느꼈다. 동의 없는 서명. 그 단어가 다른 맥락에서도 자꾸 걸렸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의 일이 먼저였다.
"민주 씨 입장에서는 자기가 서명하지 않은 서류로 '수리 완료 확인'이 된 거니까, 누수 재발에 대한 업체 책임을 따질 때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도윤이 펜을 내려놓았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서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 사수의 얼굴을 스쳤다. 놀란 건 아니었다. 비슷한 상황을 예전에 겪어 본 사람의, 기억을 억누르는 얼굴이었다.
"맞아. 그런데 반대로 건물주 쪽에서는 '임차인이 수리 완료를 확인했으니 이후 문제는 건물 노후 문제'라고 주장할 수도 있어. 서명 한 줄이 양쪽 칼이 되는 거야." 도윤이 보드를 등졌다. "내일 민주 씨 만나면 절대 먼저 추측을 말하지 마. '이 서명 본인 거 맞죠?'도 안 돼. 열린 질문으로만 가."
서하는 수첩에 밑줄을 그었다. 열린 질문. 추측 금지.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이상하게 무섭지만은 않았다. 민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탁소 바닥에 주저앉아, 젖은 셔츠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멍하니 앞을 보던 그 얼굴. 그 사람의 이름을 누군가 마음대로 빌려 썼다면, 서하는 그걸 밝혀야 했다.
조사실을 나서며 서하는 도윤의 등을 봤다. 사수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면서 습관처럼 서랍 위를 한 번 쓸었다. 포스트잇이 있던 자리. 서하는 아는 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도윤이 그 메모를 읽었다는 것, 그리고 수진에게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새벽 세 시. 서하는 책상에 엎드려 십 분만 눈을 붙이려다 핸드폰 화면을 봤다. 아버지에게 보낸 '이번 주 괜찮아?' 메시지. 읽음 표시는 여전히 없었다. 안 읽은 건지, 읽고 답을 안 하는 건지. 서하는 화면을 뒤집어 놓고 이마를 팔뚝에 묻었다. 형광등의 마지막 한 줄이 파르르 떨리다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반. 서하가 출근하자 지우가 복도에서 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평소보다 눈이 빨갰다.
"야, 너 밤새 여기 있었어? 도윤이랑?"
"배관 업체 확인서에서 이상한 거 나왔어요."
지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거라. 어떤 종류의 이상한 건데?" 말은 가벼웠지만 눈은 이미 날카로워져 있었다. 서하가 서명 이야기를 꺼내자 지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리고 한마디.
"도윤이 뭐래?"
"열린 질문으로만 가라고요."
지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종이컵을 구기면서 서하에게 등을 돌렸다. "그 말 맞아. 근데 서하야, 열린 질문보다 더 어려운 게 있어. 답을 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는 거." 복도를 걸어가는 지우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서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지우가 '도윤이 뭐래'를 먼저 물었다는 게 왜 마음에 걸리는지 생각했다.
오전 열 시. 서하는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네 번 울린 뒤 민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낮고, 잠을 충분히 못 잔 사람의 목소리.
"아, 윤 선생. 오늘은 또 무슨 서류예요."
"민주 씨, 지난달 22일에 배관 업체가 왔던 거 기억하세요?"
짧은 침묵. 그리고 민주의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그날…… 내가 가게에 없었는데. 수빈이 학교 상담 때문에."
서하는 수첩 위의 밑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추측하지 마. 확인만 해. "그날 가게에 다른 분이 계셨을까요?"
"건물주 아저씨가 열쇠 갖고 있으니까…… 혹시 들어온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근데 왜요?" 민주의 목소리에 경계가 섞였다. 서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서명 얘기를 지금 꺼내면, 민주는 또 무너질 수 있다. 새벽에 도윤이 한 말이 귓가에서 울렸다. 한 문장 때문에 사람이 쉽게 상처받는다는 것. 서하는 그 문장을 직접 쓰는 쪽이 되고 싶지 않았다.
"확인할 게 있어서요. 내일 오후에 세탁소 가도 될까요?"
"……내일은 문 열어요. 와요."
전화를 끊고, 서하는 책상 위에 확인서를 펼쳐놓은 채 한동안 서명란을 바라보았다. 가늘고 기울기가 일정한 '강민주' 석 자. 그리고 그 옆에, 연필로 희미하게 적힌 날짜. 누군가의 선의였을까, 아니면 편의였을까. 서하는 아직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서명이란 건 이름을 빌리는 게 아니라 존재를 빌리는 거라는 사실만 새벽의 형광등처럼 흐릿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켜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