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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12화]

읽지 않은 말들의 온도

작성: 2026.03.13 15:22 조회수: 8
창작물 안내
[AI 생성물] 본 소설의 내용과 표지는 인공지능(AI) 모델을 통해 기획 및 작성된 허구의 창작물입니다.
이 콘텐츠는 보험을 소재로 한 창작물이며 실제 상품 추천이나 보장 판단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오후 한 시 삼십이 분에 출근하는 기분은 이상했다. 아침 반차를 쓴 건 새벽 네 시까지 조사실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고, 강도윤이 직접 반차 신청서를 서하 책상 위에 올려둔 것도 처음이었다. 서하는 회사 앞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두 개를 사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미역 주먹밥이 매진이라 참치마요를 골랐는데, 비닐을 뜯는 손이 아직도 새벽의 형광등 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보상팀 사무실 문을 열자 한지우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모니터 위로 올린 선글라스가 머리띠처럼 걸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현장 출동 가방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아, 윤서하 씨 살아 계셨구나. 나는 또 새벽에 조사실 귀신 된 줄."

"선배, 저 반차요. 강 선배가 써 주신 거예요."

"도윤이가?" 지우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사람이 반차 신청서를 대신 써? 내가 입사 칠 년 차에 처음 듣는 소리다."

서하는 대답 대신 삼각김밥 한 개를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를 켜자 메일함에 빨간 숫자 14가 떠 있었다. 그 사이 세상이 열네 건만큼 움직인 것이다. 서하가 메일을 하나씩 내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 한 통. 발신자는 강민주였다.

'윤 선생님, 오늘 세탁소 열었어요. 지나가시면 들르세요.'

마침표 하나 없는 문장이었다. 서하는 그 문자를 두 번 읽었다. 열었어요, 라는 세 글자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지난주 월요일 불 꺼진 세탁소 안에서 주저앉아 있던 민주의 등이 떠올랐다. 서하는 지우에게 외출 한 마디를 남기고 가방을 다시 들었다.

세탁소까지는 버스 두 정거장이었다. 셔터가 올라가 있었고, 드라이클리닝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밖까지 들렸다. 문을 밀자 세제와 스팀이 섞인 뜨거운 공기가 코끝을 덮었다. 민주는 카운터 뒤에서 비닐을 씌운 코트를 행거에 걸고 있었다. 서하를 보자 손을 툭 털고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는 없고 보리차밖에 없어요."

"감사합니다."

민주가 전기포트 옆에서 종이컵 두 개를 꺼내 보리차를 따르는 동안 서하는 세탁소 안을 둘러보았다. 벽 한쪽의 물 자국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새 페인트로 덧칠한 흔적이 보였다. 바닥의 젖은 자국은 사라졌고, 대신 제습기 한 대가 구석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민주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그 서류, 서명 다른 거. 윤 선생님이 찾아낸 거라면서요."

서하의 손이 멈췄다. 수진 언니가 말한 건가. 서하는 천천히 컵을 받았다.

"제가 찾았다기보다는, 팀에서 확인 절차를 밟은 거예요. 강민주 고객님, 혹시 건물주 분이 수리할 때 열쇠로 직접 들어온 적 있으셨나요? 22일에 고객님 부재하셨다고——"

"알아요." 민주가 말을 잘랐다. 투박한 말투였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딸 학교 상담 갔던 날이잖아. 건물주 아저씨가 업체 불러서 처리해 놓겠다고 했고, 나는 고맙다고 했어요. 근데 서명까지 대신 해 놓을 줄은 몰랐지."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명 한 줄이 민주의 권리에 어떤 빈틈을 만들었는지 설명해야 할 순서였지만, 이 자리에서 그 말을 꺼내면 민주가 건물주에게 갖고 있던 유일한 고마움마저 빼앗는 셈이 될 것 같았다. 서하가 입을 열기 전에 민주가 먼저 말했다.

"윤 선생님. 나는 처음에 보험회사에서 전화 오면 또 뭐 안 된다고 하나 싶었어요. 맨날 서류 더 내라, 확인 안 된다, 그 소리만 들었으니까." 민주가 행거에 걸린 코트를 한 번 쓸어내렸다. "근데 선생님은 꺼진 가게에 와서 앉아 있는 나한테 먼저 물 한 잔 달라고 했잖아."

서하는 그날을 기억했다. 수진이 먼저 민주에게 말을 걸었고, 서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보리차를 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게 민주에겐 다르게 기억된 것이다. 서하의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고객님, 서명 건은 아직 정리 중이에요. 제가 다음 주 초까지 정확한 경과를 말씀드릴게요."

민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주름 사이로 피곤이 묻어 있었지만 무너진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서하는 보리차를 마저 마시고 세탁소를 나왔다. 바깥 공기가 차가웠고, 셔터 위 간판 글씨가 햇빛에 바래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네 시가 넘어 있었다. 도윤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모니터만 켜진 채 잠금 화면이 떠 있었다. 서하가 자기 자리에 앉아 메일을 정리하는데, 지우가 과자 봉지를 들고 다가왔다.

"민주 씨 어땠어?"

"가게 열었더라고요. 보리차 줬어요."

"보리차면 합격이야. 그 집 보리차는 VIP한테만 나와." 지우가 새우깡을 한 개 서하 책상에 올려놓으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도윤이가 네 자리에 뭐 놓고 갔는데. 거기."

서하가 키보드 옆을 보니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도윤의 글씨. 짧았다.

'민주 건 다음 주 월요일 회의 올림. 서명 건 별도 정리 — 11화 확인서 사본 네가 갖고 있어.'

서하는 그 포스트잇을 떼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11화 확인서 사본. 서하가 새벽에 복사해 둔 그 서류를 도윤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하가 따로 말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도윤은 서하가 복사하는 걸 봤거나, 아니면 복사기 기록을 확인한 것이다. 서하의 손가락이 포스트잇 모서리를 접었다. 왜 직접 말하지 않고 메모로 남겼을까. 서하는 포스트잇을 수첩 사이에 끼우고, 지우가 놓고 간 새우깡을 하나 집어 먹었다. 짠맛이 혀끝에 퍼졌다.

퇴근은 일곱 시 사십분이었다. 서하가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은별이었다.

"야, 나 회사 앞이야. 맥주 한 잔만. 딱 한 잔."

은별과의 한 잔은 늘 세 잔이 됐지만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 안 포차에 앉자 은별이 먼저 생맥주 두 잔을 시켰다. 은별의 손톱에 반쯤 벗겨진 연보라색 매니큐어가 보였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울었어?"

"안 울었어. 보리차 마셨어."

"보리차 마시면 저런 얼굴 돼? 신기하다."

서하가 웃었다. 맥주가 오자 은별이 잔을 부딪히며 물었다. 요즘 어때, 라는 평범한 질문이었다. 서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거품이 유리잔 안쪽에 줄을 남겼다.

"있잖아." 서하가 말했다. "나 왜 이 일 하는지 처음으로 좀 알겠어."

은별이 새우튀김을 집다 말고 서하를 봤다.

"진짜? 뭔데?"

"사람들이 서류 들고 오잖아. 근데 서류 뒤에 다 생활이 있어. 세탁소 아줌마는 딸 상담 가느라 가게 비웠는데 그 사이에 누가 대신 서명을 해 놓은 거야. 그 한 줄 때문에 보상이 꼬이고, 가게 문 닫고, 밀린 세탁물 앞에서 주저앉는 거야." 서하가 잔을 돌렸다. "나는 거기서 보리차나 달라고 했는데, 그 사람은 그걸 기억하고 있더라고."

은별이 한참 서하를 보다가 새우튀김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야, 그거 되게 멋있는 거 아냐?"

"뭐가."

"보리차 달라고 한 거. 다른 사람이면 괜히 위로한다고 큰 말 했을 텐데 너는 그냥 거기 앉은 거잖아." 은별이 맥주를 들며 웃었다. "윤서하, 너 원래 그런 애야. 말이 느려서 그렇지."

서하는 대답 대신 맥주를 마셨다. 목이 시원했고 코끝이 약간 매웠다. 은별이 화제를 돌려 자기 회사 카피 시안이 세 번 엎어진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는 동안, 서하는 포차 창밖으로 보이는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었다.

집에 돌아온 건 열 시가 넘어서였다. 현관등을 켜고 신발을 벗는데, 핸드폰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카카오톡. 아버지와의 대화창. 서하가 사흘 전 새벽에 보낸 메시지 — '아빠 밥 먹었어?' — 아래에 읽음 표시가 찍혀 있었다. 답장은 없었다. 하지만 읽었다. 서하는 현관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그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읽었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건지, 아니면 읽은 것만으로도 어떤 대답인 건지. 서하는 핸드폰을 꺼지지 않게 충전기에 꽂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내일은 도윤에게 물어봐야 한다. 복사기 기록을 왜 확인했는지.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포스트잇처럼 붙었다 떨어졌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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