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일곱 시, 을지로 골목 안쪽 이자카야. 은별이 생맥주 두 잔을 한꺼번에 들고 오며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서하는 코트를 벗다 말고 친구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평소보다 볼이 발갛고, 눈이 반짝이는 게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야, 나 할 말 있어." 은별이 맥주잔을 밀며 말했다. "먼저 한 모금 마셔. 안 그러면 네가 먼저 울어."
서하는 웃으며 잔을 받았다. "뭔데, 퇴사야? 로또야?"
"결혼."
맥주 거품이 입술에 닿기 직전이었다. 서하의 손이 멈췄다. 1초, 2초. 은별의 표정이 장난에서 진심으로 바뀌는 게 보였다. 서하는 잔을 내려놓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진짜?"
"진짜. 5월에 할 것 같아. 스드메는 아직 하나도 못 정했고, 식장은 어머니가 이미 세 군데 잡아두셨어. 나는 그냥 끌려다니는 중이야." 은별이 웃었지만 손가락 끝이 맥주잔을 계속 돌리고 있었다. 서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은별이 긴장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축하해." 서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담담하게 나왔다. "진심으로."
"……고마워." 은별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장례식 온 사람 같아."
"아니, 진짜 좋은데." 서하가 억지로 볼을 들어올렸다. "그냥 갑자기 우리 진짜 어른이 되긴 하는구나, 싶어서."
은별이 서하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야, 나 카피라이터야. 감정 포장하는 거 직업인데 네 연기가 통할 것 같아? 솔직히 말해. 뭐가 복잡해?"
서하는 웃음이 났다. 정말로. 이 사람 앞에서는 숨기는 게 시간 낭비였다.
"복잡한 건 아니야. 그냥……" 서하가 에다마메를 하나 집어 까면서 말했다. "나는 요즘 세탁소 아줌마 서류 수정하고, 사수 눈치 보고, 아버지한테 전화도 제대로 못 하고 살거든. 근데 너는 웨딩홀을 보러 다녀. 같은 시간인데 사는 게 너무 다른 거 아니야?"
은별이 피식 웃었다. "뭘 로맨틱하게 포장하고 있어. 나도 이번 달 카드값 230이야. 웨딩홀이 무슨 디즈니랜드인 줄 알아? 예식장 주차장에서 울었어 나."
"왜?"
"견적서 보고." 은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둘은 동시에 터졌다. 서하가 테이블을 치며 웃는 사이 은별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청첩장 시안이었다.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바탕에 은별 특유의 카피가 작게 들어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시시한 하루를 고른 사람들입니다.'
"이거 네가 쓴 거야?"
"응. 대표님이 이걸 왜 광고가 아니라 청첩장에 쓰냐고 했어."
서하는 문구를 한참 들여다봤다. 시시한 하루. 그 단어가 목에 걸렸다. 자기에게 시시한 하루를 같이 보낼 사람이 있는가, 묻는 것 같았다. 지금 서하의 시시한 하루에는 접수 번호와 수정 요청과 3초짜리 통화만 있었다.
"……예쁘다." 서하가 말했다. 이번엔 진짜였다.
은별이 휴대폰을 거두며 조용히 말했다. "서하야, 나 사실 좀 무서워."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결혼이 무서운 게 아니라, 이제 진짜 어른인 척을 계속해야 되잖아. 회사에서도, 시댁에서도, 남편 앞에서도." 은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카피는 잘 쓰면서 내 인생에는 맞는 문장이 없는 것 같아, 가끔."
서하는 대답 대신 은별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두 사람은 잠깐 말없이 마셨다. 가게 안에서 누군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박수 소리가 났다. 서하는 은별이 웃는 얼굴 뒤에 숨긴 떨림을 보았고, 은별은 서하가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삶의 빈칸을 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오래된 친구 사이에는 그런 게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공허함이 테이블 위로 조용히 올라오는 순간.
가게를 나온 건 열 시가 넘어서였다. 서하는 을지로 골목을 걸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발신 기록을 열었다. '아빠'라는 이름 옆에 마지막 통화 시간이 보였다. 3초. 그 숫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였다. 엄지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멈췄다. 은별의 청첩장 문구가 떠올랐다. 시시한 하루를 고른 사람. 서하는 아버지와 시시한 하루를 보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다섯 번 울렸다. 여섯 번. 일곱 번. 받지 않았다. 서하는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3월의 밤바람이 차가웠다. 괜찮아, 늦은 시간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발걸음이 느려졌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면서 카톡을 열었다. 아버지와의 대화창. 마지막 메시지는 서하가 보낸 것이었다. '아빠 밥 먹었어?' 읽음 표시만 있고 답장은 없었다. 서하는 화면을 껐다. 어떤 문장을 써야 이 사람이 대답할까, 생각했다. 보험 서류처럼 정확하게 써야 하나. 아니면 은별처럼 예쁜 카피를 붙여야 하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토요일 오전, 서하는 반차 대신 사무실에 나왔다. 민주 건 서류 수정본을 수진에게 다시 보내기 위해서였다. 팩스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사무실은 비어 있었고, 형광등 절반이 꺼진 보상팀 공간은 평일과 전혀 다른 공기였다. 서하는 자기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다가 고개를 돌렸다. 도윤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도윤은 책상을 늘 깨끗하게 비우고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모니터 옆에 펜 한 자루, 메모지 한 권. 그런데 오늘은 키보드 옆에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서하는 일어서지 않았다. 볼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포스트잇의 글씨가 도윤 것이 아니었다. 둥글고 작은 글씨. 서하는 그 필체를 알았다. 수진의 글씨였다.
'2019 건 — 원무과 기록 남아 있음. 확인 요망.'
서하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2019. 며칠 전 도윤이 강하게 선을 그은 바로 그 해. 서하는 시선을 거두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노트북 화면에 민주의 접수 서류가 떠 있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진이 도윤에게 직접 메모를 남겼다는 건, 전화나 메신저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서하는 팩스를 보내고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버지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은별에게서 사진 한 장이 와 있었다. 어젯밤 둘이 찍은 셀카 아래에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네 축하가 제일 좋았어. 고마워, 진짜로.'
서하는 웃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다시 도윤의 책상 위 포스트잇이 떠올랐다. 원무과 기록. 수진. 2019. 아직 묻지 말아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서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묻지 않는 것과 모르는 것은 같지 않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