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9시 7분. 서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텀블러 뚜껑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돌려도 잠기지 않았다. 출근 3분 전, 복도,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지우의 목소리.
"서하야, 그거 반대로 돌리고 있어."
돌아보니 지우가 한 손에 편의점 비닐을 들고 서 있었다. 삼각김밥 세 개와 바나나맛 우유가 비닐 사이로 비쳤다. 서하가 뚜껑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자 한 번에 딸깍 잠겼다. 지우가 킥킥 웃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어제 잠 못 잤지? 눈이 삶은 계란이야."
서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밤새 민주의 세탁소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물에 젖은 세탁물, 바닥에 고인 물, 전화를 끊기 직전 민주가 했던 말.
'내일도 가게 열어야 해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공기가 달랐다. 평소라면 커피머신 앞에서 누군가 투덜거리고, 누군가는 모니터를 켜며 하품하는 느슨한 풍경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도윤이 자기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었는데, 양쪽 턱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하는 그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서명 문제가 터졌던 날, 딱 한 번.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지우가 비닐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서하보다 먼저 분위기를 읽은 건 역시 지우였다. 도윤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메일 확인해."
서하가 자리에 앉아 메일함을 열었다. 팀 전체에 참조로 걸린 메일이 하나 있었다. 보낸 사람은 고객지원센터. 제목은 '보상 담당자 태도 관련 민원 접수 안내(처리번호 2026-0317-009)'. 본문을 훑던 서하의 시선이 한 줄에서 멈췄다. 지난주 현장 조사 중 보상 담당자가 고객에게 위압적인 어조로 질문했고, 마치 고객을 의심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는 내용이었다. 민원을 제기한 고객은 민주가 아니었다. 교통사고 후유장해 관련 건이었고, 현장 조사를 나간 담당자는 한지우였다.
서하가 고개를 돌렸다. 지우는 자기 자리에 앉아 삼각김밥 비닐을 뜯고 있었다. 손은 멈추지 않았다. 비닐을 뜯는 손끝은 정확했고 표정에도 동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삼각김밥을 한 입도 베어 물지 않았다.
"지우 선배."
서하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지우가 삼각김밥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아니, 웃는 시늉을 했다.
"읽었어? 나도 방금 읽었어. 재밌지? 월요일 아침부터 스펙터클하게 시작하네."
도윤이 그제야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서하는 그 시선이 지우를 향하는 걸 봤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재고 있는 눈이었다.
"한지우, 10시에 팀장실."
"알겠습니다."
대답은 짧았다. 평소 같으면 팀장님이 커피라도 사주시냐는 농담이 붙었을 텐데, 오늘은 없었다. 서하는 그 빈자리가 오히려 더 크게 들렸다.
10시까지 남은 50분 동안 서하는 민주의 세탁소 누수 건 서류를 정리하려 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민원 메일의 문장 하나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담당자의 태도가 마치 사기를 저지른 사람을 다루듯 했다.'
서하는 지우가 현장에서 어떻게 말하는지 떠올렸다. 빠르고 직설적이지만 상대를 깔보는 투는 아니었다. 적어도 서하가 본 지우는 그랬다. 그런데 고객 입장에서는 다르게 들릴 수도 있을까. 그 질문이 자꾸 손끝을 붙잡았다.
수진이 외근에서 돌아온 건 10시 직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메일을 확인한 수진이 3초 만에 고개를 돌려 서하를 봤다.
"이거 언제 온 거야?"
"아침에요. 출근하니까 있었어요."
수진이 모니터를 다시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건, 지난달에 현장 나간 거잖아."
서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민원 한 건이면 끝나는 게 아니야. 내규에 따라 이번 분기 실적 평가에 반영될 수도 있고, 심하면 인센티브 환수까지 갈 수 있어."
서하의 손이 멈췄다.
"환수요?"
"응. 담당자 과실로 분류되면 해당 건 성과 수당이 빠져."
수진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서하는 그 짧은 침묵 속에 담긴 뜻을 읽었다. 현장에서 고객을 만나 사실을 확인하려고 질문을 던진 사람이, 민원 한 통으로 그달 생활비를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팀장실 문이 열리고 지우가 나왔다. 표정이 없었다.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컵 커피를 하나 뽑아 건넸다. 지우는 받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팀장님 뭐래요?"
"경위서 쓰래. 해당 고객 접촉 내역이랑 녹취 확인하고."
지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천장을 봤다.
"근데 있잖아, 그 고객. 내가 위압적으로 말했다고 했는데, 나 그날 그 사람한테 딱 한 마디 물어본 거야."
지우가 잠깐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숨을 고르는 소리에 가까웠다.
"사고 당시 차량 속도 기억나세요?"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게 위압적이래. 한 문장이."
그 말이 이상하게 사무실 전체에 남았다. 누구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는데, 서하는 자기 목 뒤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질문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확인이고, 누군가에게는 의심이 된다. 그 차이가 이렇게 비싸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점심시간이 됐지만 서하는 밥을 사러 나가지 못했다. 자판기 앞에서 수진과 마주치자 수진이 캔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를 밀어줬다.
"지우 선배 괜찮을까요?"
수진이 캔을 따며 말했다.
"이런 유형은 대부분 경위서 내고 끝나. 근데 문제는 그 경위서가 인사 기록에 남는다는 거야. 환수 규정이 적용되면 이번 달 실적 수당도 날아갈 수 있고."
서하는 캔커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게 공정한 건가요? 질문 한 마디 했다고?"
수진이 서하를 봤다. 냉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공정한지는 나도 모르겠어. 근데 규정은 그렇게 돼 있어. 그래서 다들 말투 하나에도 예민한 거고."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넘기기엔 너무 억울했고, 그렇다고 규정을 모른 척하기엔 너무 현실적이었다. 그 순간 서하는 처음으로 알았다. 이 팀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말 몇 마디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다가가는 일과 기록에 남지 않게 버티는 일은 전혀 다른 종류의 체력이 필요했다.
오후 세 시, 서하는 민주의 세탁소 누수 건 서류를 마무리하다가 지우의 자리를 봤다. 지우는 경위서를 쓰고 있었다. 키보드를 치는 속도가 평소의 절반이었다. 몇 줄 쓰고 멈췄다가, 다시 지우고, 또 멈췄다. 장난처럼 말이 많던 사람이 문장 하나를 고르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걸 보자 서하는 괜히 숨이 막혔다.
그때 도윤이 지우 자리 옆을 지나갔다. 멈추지 않았다. 대신 지나가면서 지우 책상 위에 뭔가를 툭 내려놓았다.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였다. 아침에 지우가 비닐만 뜯고 끝내 먹지 못한 것과 같은 종류였다.
도윤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우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삼각김밥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비닐을 뜯었다.
"선배."
서하가 작게 부르자 지우가 피식 웃었다.
"나 안 잘려. 그런 얼굴 하지 마."
농담처럼 들렸지만 끝이 조금 갈라져 있었다. 서하는 그제야 자기가 하루 종일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불안, 억울함, 그리고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의 미안함. 그런데 지우가 삼각김밥을 한 입 베어 문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을 짓누르던 게 조금 풀렸다.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어도, 적어도 혼자 버티는 건 아니라는 신호 같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서하는 모니터 한쪽에 미뤄 둔 링크를 다시 열었다. 지우가 전날 보내 준 과거 유사 사례 파일이었다. 건물 배관 관련 보상 사례 모음이 줄줄이 뜨는 화면을 넘기다가, 세 번째 파일에서 손이 멈췄다. 담당자 이름란에 '강'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이름 전체는 가려져 있었지만, 팀 안에서 그 성을 가진 사람을 서하는 한 명밖에 몰랐다.
순간 아침에 지우가 했던 말이 겹쳐 떠올랐다.
'도윤 선배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
그때는 순서 문제인 줄 알았다. 그런데 파일 속 이니셜을 보는 순간, 그 말이 전혀 다르게 들렸다. 서하는 메신저 창을 열었다. 수신인은 한지우.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물어볼까.
아니면 도윤에게 직접 확인할까.
선택해야 했다. 그냥 파일을 닫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 내내 지켜본 얼굴들이 자꾸 떠올랐다. 경위서를 쓰던 지우의 손, 아무 말 없이 삼각김밥을 내려놓던 도윤, 규정은 그렇다면서도 끝내 시선을 피하지 않던 수진. 서하는 결국 메신저를 닫았다. 지금은 지우를 더 흔들고 싶지 않았다. 대신 파일명을 메모장에 적어 두고 화면을 캡처했다. 내일, 도윤에게 직접 묻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버지, 윤태훈.
서하는 화면을 3초쯤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밥은 먹었냐."
"네."
"그래."
전화는 금방 끊겼다. 4초. 서하는 꺼진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작게 웃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질문 한마디가 사람을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그 짧은 말이 걱정처럼 들렸다. 하루가 사람을 이렇게 바꿔 놓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가방을 챙기며 모니터를 한 번 더 봤다. 과거 사례 파일의 '강' 이니셜이 화면 위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 첨부 이력란에 작은 메모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재검토 요청 보류 - 내부 협의 필요.'
서하는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단순한 과거 사례가 아니라면, 도윤이 그 사건 이야기에 입을 닫는 이유도 거기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오늘 지우에게 떨어진 민원 한 통이 정말 우연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