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서하의 모니터에는 엑셀 창 네 개와 메신저 알림 일곱 개가 겹쳐 떠 있었다. 숫자보다 더 정신없는 건 사람 목소리였다. 누군가는 주말 약속 얘기를 했고, 누군가는 회식 장소 링크를 다시 올렸고, 팀장은 복도 끝에서 "오늘은 도망 금지"를 세 번쯤 외쳤다. 퇴근 직전인데도 퇴근과 가장 먼 분위기. 금요일 저녁의 사무실은 늘 그랬다.
그때 한지우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야, 오늘 회식 몇 시래?"
"일곱 시요. 팀장님이 고기 사신대요."
"고기? 소? 돼지?"
"삼겹살이요."
지우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삼겹살이면 최소 소주 세 병. 오늘은 말실수 나오는 날이네."
"그걸 왜 그렇게 예언처럼 말하세요."
"회식은 원래 그래. 고기는 입에 들어가고, 비밀은 입 밖으로 나오고."
지우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돌아갔다. 서하는 피식 웃다가도 괜히 찜찜해졌다. 이번 주는 특히 그랬다. 대리서명 건 이후로 팀 안 공기는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서하에게는 자꾸 한 박자 늦게 닿았다. 아무도 대놓고 뭐라 하진 않았는데,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실수는 지나갔는데 마음은 아직 통과 중인 느낌이었다.
여섯 시 반, 사무실 불이 하나둘 꺼질 무렵 휴대전화가 울렸다. 은별이었다.
"서하야, 나 지금 너네 회사 근처야. 거래처 미팅 끝났는데 밥 같이 먹을까?"
회식이라고 말하면 끝날 일이었다. 딱 한 문장이면 됐다. 그런데 서하는 모니터를 끄다 말고 이상하게 다른 말을 꺼냈다.
"아, 나 오늘 팀 사람들이랑 간단히 저녁 먹기로 했어. 거의 업무 미팅 같은 거라서 빨리 끝날 거야. 끝나면 연락할게."
말이 나간 뒤에야 서하는 눈을 감았다. 업무 미팅이라니. 삼겹살집에 가면서 무슨 업무 미팅인가. 그런데도 방금 한 거짓말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은별에게는 늘 회사 얘기를 조금 둥글게 했다. 잘 적응하고 있다고, 사람들도 괜찮다고, 바쁘긴 해도 할 만하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정확한 말도 아니었다. 이번 주처럼 숨이 턱 막히는 날이 있었다는 건 아직 말하지 못했다. 말하면 진짜 힘든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피했다.
일곱 시, 을지로 골목 안쪽 삼겹살집. 문을 열자 고기 냄새와 사람 목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팀장은 이미 상석에 앉아 있었고, 강도윤은 그 옆에, 지우는 자연스럽게 불판 앞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하는 구석 자리에 앉아 물수건으로 젓가락을 괜히 한 번 더 닦았다.
팀장이 잔을 들었다.
"이번 분기 다들 고생 많았고. 특히 윤서하 씨, 신입치고 민원 대응 잘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작게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생각보다 얇았다. 도윤은 잔을 기울일 뿐 별말이 없었다. 그 무표정이 요즘은 이상하게 더 신경 쓰였다. 혼난 적보다 평가를 아직 유보당한 느낌이 사람을 더 긴장하게 만든다는 걸, 서하는 입사 후 처음 알았다.
고기가 한 판 올라가고 소주병이 한 병 비워질 즈음 분위기는 조금 풀렸다. 지우가 집게를 흔들며 물었다.
"서하, 너 요즘 주말에 뭐 해? 취미 같은 거 있어?"
솔직히 말하면 넷플릭스, 빨래, 밀린 잠이었다. 그런데 다들 가볍게 웃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그 대답은 너무 축축해 보였다. 서하는 별생각 없이 다른 문장을 골랐다.
"저 요즘 러닝 시작했어요. 한강에서 뛰고 있어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서하는 속으로 자기 이마를 쳤다. 러닝화는 있긴 했다. 현관 신발장 구석에, 작년 세일 때 사 놓고 한 번도 안 신은 채로. 지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의외다. 너 체력파였어?"
팀장도 반색했다.
"좋지, 좋지. 내가 예전에 하프 뛰었잖아. 러닝은 호흡이 중요해. 처음엔 무리하면 안 되고—"
아, 망했다. 서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미 거짓말은 설명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때 식당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서하야!"
익숙한 목소리에 서하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은별이었다. 손에 종이가방을 들고, 패딩 지퍼를 반쯤 내린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반가워야 정상인데, 서하는 심장이 먼저 철렁 내려앉았다.
"어? 너 업무 미팅이라며?"
은별이 식당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웃었다.
"이건 누가 봐도 회식인데? 그것도 아주 정직한 삼겹살 회식."
지우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어머, 누구세요? 서하 친구? 어서 오세요. 자리 있어요. 지금 오시면 제일 맛있는 타이밍이에요."
"아, 은별아, 그게…"
서하가 말을 잇기도 전에 은별은 이미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팀장은 손님이 왔다며 잔을 하나 더 꺼냈고, 지우는 의자를 끌어 줬다. 도윤은 잠깐 서하를 봤다가 다시 고기를 뒤집었다. 아주 짧은 시선이었는데도 서하에게는 이상하게 길게 남았다. 설명하라는 건지, 굳이 하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눈빛. 어느 쪽이든 편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은별은 적응이 빨랐다. 삼 분도 안 돼 지우와 드라마 얘기로 웃고 있었고, 팀장에게는 "삼겹살은 목살이랑 반반이 진리죠" 같은 말로 금세 점수를 땄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서하가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다면서요? 얘 원래 은근 독해요. 요즘은 주말에 러닝까지 한다고 해서 제가 깜짝 놀랐잖아요."
서하는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콜록거리는 사이 지우가 등을 툭 쳤다.
"괜찮아? 러너는 폐활량이 좋아야 하는데."
놀리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애매한 말에 서하의 귀가 더 뜨거워졌다. 은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었다. 일주일 전, 한강 사진에 '#러닝시작' 해시태그를 달아 올린 게 떠올랐다. 산책하다 찍은 사진이었다. 거짓말 하나가 다른 거짓말의 증거가 되는 순간이었다.
서하는 지금 선택해야 했다. 그냥 웃으며 넘길지, 아니면 여기서라도 정정할지. 회식 자리 한가운데서 "사실 저 안 뛰어요"라고 말하는 상상을 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국 서하는 또 웃었다. 그 웃음이 오늘 들어 가장 어색했다.
그때 도윤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은별을 향해 물었다.
"윤서하 씨 친구분이면, 서하 씨가 회사에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시겠네요."
은별이 눈을 반짝였다.
"당연하죠. 얘 회사 얘기 잘 안 하거든요."
서하의 손끝이 굳었다. 머릿속으로 최악의 경우가 몇 개나 지나갔다. 이번 주 서류 건을 꺼내면 어쩌지. 아직 배우는 중이라며 선을 그으면 어쩌지. 회식 자리의 소음이 갑자기 멀어지고, 불판 위 고기 익는 소리만 또렷해졌다.
도윤이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아직 배우는 중이에요."
서하의 심장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그런데 도윤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근데 포기는 안 하더라고요. 그건 보기보다 쉽지 않아요."
지우가 바로 맞장구쳤다.
"그건 인정. 울상이어도 다시 전화는 하더라. 그게 신입 때 제일 힘든 건데."
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실수 안 하는 사람 없지.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서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안도, 민망함, 고마움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특히 도윤의 말은 칭찬처럼 들리면서도 경고처럼 들렸다. 포기는 안 한다. 뒤집으면, 포기할 수도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뜻 같아서. 은별은 괜히 뿌듯한 얼굴로 서하 어깨를 툭 쳤다.
"역시 우리 서하네."
우리 서하. 그 말이 이상하게 더 찔렸다. 친구 앞에서는 잘 버티는 사람이고 싶었고, 회사에서는 믿을 만한 신입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회식 자리에서 서하는 둘 다 연기하고 있었다. 잘 지내는 척, 여유 있는 척, 원래부터 그런 사람인 척. 웃고 있는데 속은 자꾸만 쪼그라들었다.
회식이 끝난 건 아홉 시 반이 넘어서였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 삼월 밤바람이 얼굴을 식혔다. 팀장과 지우는 택시를 잡으러 먼저 걸어갔고, 도윤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골목 끝으로 향했다. 서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잠깐 망설였다. 아까 말, 감사합니다 정도는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결국 부르지 못했다. 오늘 하루에 이미 너무 많은 타이밍을 놓친 기분이었다.
대신 서하는 은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금 또 넘기면 집에 가서 더 후회할 것 같았다. 적어도 하나는 바로잡아야 했다. 그게 오늘 서하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이었다.
은별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야, 너네 사수 되게 무섭다. 근데 마지막 말은 좀 멋있던데? '포기는 안 한다.' 그거 거의 드라마 대사 아니냐."
서하는 웃지 못했다. 몇 걸음 더 걷다가 결국 말했다.
"은별아. 나 사실 러닝 안 해."
"어?"
"한강에서 뛴 적 없어. 그냥 산책하다 사진 찍은 거야. 오늘도 업무 미팅 아니고 그냥 회식이었고."
은별이 걸음을 멈췄다. 서하도 따라 멈췄다. 골목 입구 편의점 불빛이 두 사람 얼굴에 어정쩡하게 걸쳤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서하는 가방 끈만 만지작거렸다. 변명은 준비돼 있었는데,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별이 먼저 피식 웃었다.
"아, 진짜? 나 그 해시태그 보고 감동했는데. '드디어 서하도 자기관리 시작했구나' 하고."
"미안."
"근데 왜? 나한테까지 왜 그렇게 포장해?"
장난기 섞인 말투였지만, 질문은 정확했다. 서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힘든 걸 설명할 기운이 없어서. 걱정시키기 싫어서. 이유는 많았는데, 입 밖으로 꺼내려니 다 비슷한 말 같았다. 한참 뒤에야 겨우 말했다.
"그냥… 내가 좀 괜찮아 보였으면 했나 봐. 너한테도, 나한테도."
은별은 잠깐 서하를 보더니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열어 붕어빵 두 개를 꺼냈다.
"가져다주려고 산 건데, 지금 먹자. 너 지금 설명 더 하면 울 것 같아."
"내가 왜 울어."
"입술 삐죽한 거 봐. 거의 울기 직전이야."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 웃음 덕분에 목에 걸려 있던 게 조금 내려갔다. 두 사람은 편의점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붕어빵을 먹었다. 서하는 팥이 뜨거워 입천장을 데였고, 은별은 물을 건네며 말했다.
"봐. 러닝은 안 해도 허겁지겁 먹기는 국가대표다."
"진짜 얄미워."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냥 솔직히 말해. 회식이면 회식, 힘들면 힘들다. 네가 맨날 괜찮은 척하면, 나는 네가 진짜 괜찮은 줄 알잖아."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서하는 대답 대신 붕어빵 꼬리를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소리가 작게 났다. 그 순간만큼은 거짓말도, 서류도, 도윤의 시선도 조금 멀어졌다. 그냥 오래된 친구 둘이 차가운 밤에 붕어빵을 나눠 먹는 시간 같았다.
집에 도착한 건 열한 시였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신발장 구석의 러닝화가 눈에 들어왔다. 먼지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서하는 한참 그걸 바라보다가 신발을 꺼내 현관 앞에 나란히 놓았다. 당장 신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더 안쪽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 내내 숨기고 덮어 둔 것들이 꼭 저 신발 같았다. 있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한 번도 꺼내 쓰지 않은 것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수진이었다.
'서하 씨, 월요일에 민주 씨 건 서류 재확인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원무과 쪽에서 연락 왔는데, 이상한 게 하나 있어서.'
서하는 답장을 치다가 멈췄다. 이상한 게 하나. 고작 다섯 글자인데, 방금 전까지 남아 있던 붕어빵의 온기가 순식간에 식었다. 원무과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4화 때 도윤 메일 수신자 목록에서 스쳐 지나간 낯선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우연일 수도 있었다. 별일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수진의 메시지 아래로 부재중 전화 한 통이 더 떠 있었다. 발신자는 원무과. 시간은 불과 십 분 전이었다.
서하는 화면을 한 번, 현관 앞에 꺼내 둔 러닝화를 한 번 번갈아 봤다. 오늘은 겨우 하나의 거짓말을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밤은 전혀 다른 쪽에서 다시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종류가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