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국내 전분 및 전분당 시장을 장악한 4개 제조사의 장기간 가격담합을 적발하고, 역대 최대 규모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대상, 사조씨피케이, 삼양사, 씨제이제일제당 등 4개 전분·전분당 제조·판매사(이하 전분사)가 2018년 5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7년 5개월에 걸쳐 식품업체, 제지사, 철강사 등 사업자 간 거래에 적용되는 전분·전분당 가격의 인상과 인하를 합의하고 실행한 행위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총 7,475억 7,8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고 7일 밝혔다. 이는 공정위가 담합 사건에서 부과한 과징금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전분과 전분당은 제과·제빵·제면, 음료, 빙과, 맥주 등 식품뿐 아니라 제지, 철강 등 다양한 제조업 분야에서 원재료로 사용되는 필수 소재다. 따라서 전분당 가격이 오르면 전후방 산업 전체에 연쇄적인 물가 상승 영향이 미친다. 전분당의 주원료인 수입 옥수수는 4개 전분사가 공동으로 수입하고 있는데, 정부는 전분당이 국민 물가와 산업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2021년 4월부터 매년 200만 톤 내외의 가공용 옥수수에 대해 할당관세(0%)를 적용해 왔다.
그러나 국내 B2B 전분당 시장에서 매우 높은 점유율(전분 95.7%, 전분당 86.4%)을 차지한 4개 전분사는 이 같은 정부 지원에도 불구하고 7년 5개월의 장기간 동안 총 13차례에 걸쳐 판매가격의 인상·인하 폭과 시기를 합의하고 이를 실행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국민경제 전반이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원가 부담을 거래상대방에게 전가하기 위해 가격담합을 했으며, 이를 통해 부당이득을 극대화했다.
4개 전분사는 옥수수 가격이 인상되는 시기에는 원가 상승분을 신속히 거래처에 전가하기 위해 판매가격 인상을 8차례 합의하고 전체 B2B 거래처를 대상으로 실행했다. 전분·전분당은 원재료인 옥수수 가격이 제조원가의 60~70%를 차지할 정도로 원가 의존도가 높다.
반면 옥수수 가격이 인하되는 시기에는 거래처의 가격인하 요구에 대응해 인하 폭을 최소화하고 인하 시기를 최대한 늦추기로 5차례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전분사들은 가격 인하를 요구하는 대형 실수요처에 대해서는 가격을 내려주고, 소규모 실수요처나 대리점에 대해서는 최대한 판매가격을 유지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했다.
전분사들은 가격변경 시 거래처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격변경의 폭과 시기뿐 아니라 가격변경의 근거(환율, 원료가 등)와 공문 발송 시기까지 구체적으로 합의했다. 4개사는 전분당 품목별 목표가격을 합의한 뒤, 전분사별로 그보다 높은 금액을 순차적으로 거래처에 통보함으로써 거래처가 목표가격을 최대한 수용하도록 압박하고 유도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합의 이후 전분사들은 실제 합의 내용대로 거래처에 공문을 발송하면서 이행 여부를 매우 철저하게 점검했다. 각자 실수요처에 공문을 발송하기로 한 날짜에 상대방 회사를 방문해 공문에 품목별 인상폭, 인상시기, 공문 수신처 주소 등이 합의 내용에 따라 기재됐는지 확인하고, 우체국까지 동행해 실제로 공문이 발송되는지 확인했다. 또한 전체 거래처에 가격변경 계획을 통지한 뒤 필요한 경우 거래처와 가격협상을 진행했는데, 각 수요처별로 가장 거래 비중이 높은 전분사(주관사)가 협상을 주도하고 다른 전분사(비주관사)는 주관사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하면서 함께 설득하는 등 목표가격 수준으로 가격이 결정되도록 지원했다.
국내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차지한 전분사들은 국제 옥수수 가격 상승기에는 전분당 판매가격을 신속하게 최대한 인상하고, 옥수수 가격 하락기에는 가격 인하를 최대한 지연했다. 특히 합의 기간 중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국제 옥수수 가격이 급등하자 담합을 시작했던 2018년 5월에 비해 판매가격을 최대 73% 인상했다. 그 결과 전분사들은 옥수수 가격이 상승하는 동안에도 영업이익의 하락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옥수수 가격이 하락하는 동안에는 원가 인하폭에 비해 판매가격 인하폭을 최소화함으로써 가격 인하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이 오히려 개선됐다. 원가 부담은 실수요처와 대리점, 나아가 최종 소비자에 대한 물가인상 요인으로 전가됐다.
공정위는 4개 전분사에 대해 법위반행위 금지명령과 함께 전분사들이 국내에서 판매하는 전분당 제품에 대해 담합 전 경쟁을 회복하는 수준으로 가격을 독자적으로 재결정하고 향후 3년간 반기마다 변경 내역을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독자적 가격 재결정 명령은 밀가루 담합 건(2006년 4월, 2026년 5월), 인쇄용지 담합 건(2026년 4월)에 이어 네 번째로 부과된 것이다. 공정위는 이 사건의 공동행위가 7년 5개월의 장기간 관행처럼 지속돼 온 점, 국내 전분당 시장은 지난 20여 년간 4개 전분사들 간 시장점유율의 큰 변동 없이 과점체제가 유지되고 있어 담합 재발 가능성이 큰 점, 마지막 합의 시 결정된 가격이 담합 이전 경쟁상황 수준으로 인하됐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을 고려해 이 같은 조치를 내렸다.
이번 조치는 장기간 국내 전분당 시장에서 지속된 전분사들의 가격담합을 제재한 사건으로, 최근 공정위가 조치한 제당사, 제분사, 제지사 등의 담합 사건에 이어 국민들이 피부로 체감하는 식료품 등의 가격을 안정시키고 독과점 사업자들의 담합을 통한 부당한 가격 인상에 경종을 울릴 것으로 기대된다. 공정위는 앞으로도 국민 생활과 밀접한 분야의 담합행위에 대한 감시를 지속적으로 강화할 것이며, 적발될 경우 예외 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법 집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국내 전분당 시장은 담합 발생이 용이한 과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수입 비중이 높지 않아 4개 전분사의 시장점유율이 전분 95.7%, 전분당 86.4%로 매우 높으며, 대규모 장치 산업의 특성상 신규 사업자의 진입이 어려워 지난 20년간 이들의 점유율이 큰 변동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특히 4개 전분사는 해외에서 가공용 옥수수를 공동으로 구매·운송함으로써 원가구조가 유사하고, 전분당 제품의 품질이 유사하고 규격이 표준화돼 있어 가격이 매우 중요한 경쟁 요소이므로 가격담합의 유인이 크고 용이했다.
전분사들은 임원급 모임에서 목표가격, 적용 시기 등을 개략적으로 합의하고, 팀장급 모임에서 거래처에 제시할 가격 변동 근거(원가요인), 품목별 목표 인상 금액, 인상 시점, 사업자별 공문 발송 순서·일자, 공문에 기재할 인상적용 일자 및 금액 등을 세부적으로 합의했다. 예를 들어 한 합의에서는 인상 이유로 2018년 5월 대비 2020년 12월의 원료가격 16%, 환율 3% 인상을 제시하고, 목표 인상금액 및 각 사별 거래처에 제시할 가격, 가격인상 적용 시점(대리점 12월 1일, 대형 실수요처 12월 16일), 각 사별 공문발송 시점 등을 합의했다.
전분사들은 합의된 내용에 따라 가격 변경 품의를 하고 공문 또는 구두를 통해 전체 거래처에 통지함으로써 합의를 실행했다. 여러 단계를 거쳐 실제 합의내용이 실행되는지 치밀하게 점검했으며, 다른 전분사의 가격 인상이 합의 내용대로 실행되지 않은 경우 해당 전분사에 연락해 이행을 독촉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에서 부과된 과징금은 업체별로 대상 2,341억 4,100만 원, 사조씨피케이 2,001억 3,200만 원, 삼양사 2,103억 4,000만 원, 씨제이제일제당 1,029억 6,500만 원 등이다. 공정위는 지난 3월 검찰이 고발 요청한 4개 법인 및 임직원들에 대해서는 이미 고발한 상태다.
과거 담합 사건 중 과징금 부과액 상위 5건을 보면 1위는 2010년 6개 LPG 공급회사의 부당한 공동행위(6,689억 원), 2위는 2026년 3개 설탕 제조·판매 사업자의 부당한 공동행위(3,960억 원), 3위는 2016년 한국가스공사 발주 LNG 저장탱크 건설공사 입찰 관련 13개 사업자의 부당한 공동행위(3,505억 원), 4위는 2014년 호남고속철도 공사 입찰 관련 28개 사업자의 부당한 공동행위(3,478억 원), 5위는 인쇄용지 관련 6개 제지사업자의 부당한 공동행위(3,383억 원) 순이다. 이번 전분사 담합 건은 이들보다 훨씬 큰 규모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전분사 4개사의 2025년 기준 매출액은 대상 3조 5,288억 원, 사조씨피케이 3,828억 원, 삼양사 1조 8,971억 원, 씨제이제일제당 7조 2,811억 원 등이다. 이들 업체는 이 사건에 대한 과징금 부과액을 예상해 당기순이익에 선반영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