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는 반쯤 내려간 채 녹슨 레일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민주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한 번 더 힘을 줬지만 쇠가 쇠를 긁는 소리만 골목에 울릴 뿐이었다. 어젯밤 누수로 바닥에 고인 물이 셔터 하단 레일까지 먹었다. 녹이 하룻밤 새 슨 건 아닐 테지만, 어젯밤의 물이 그 녹을 완전히 굳혀놓은 것 같았다. 민주는 손바닥에 묻은 붉은 가루를 앞치마에 문지르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오전 여덟 시 사십 분. 평소라면 드라이클리닝 기계가 예열을 마치고 첫 번째 와이셔츠가 행거에 걸릴 시간이다.
"엄마, 그거 억지로 올리면 레일 아예 나가."
준수가 편의점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골목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봉지 안에는 삼각김밥 두 개와 커피 캔이 보였다. 민주는 아들이 왜 이 시간에 학교가 아니라 여기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에서 먼저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
"수리 부르면 얼마나 할까."
"몰라. 근데 셔터만 문제가 아니잖아."
준수가 셔터 틈새로 안을 들여다봤다. 어젯밤 빗물이 천장 틈새를 타고 내려오면서 세탁소 안은 엉망이었다. 다림질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장부는 이미 어제 젖었고, 완성된 세탁물 중 바닥 가까이 놓인 것들은 습기를 먹었다. 준수의 표정이 어제 장부를 봤을 때처럼 다시 굳었다. 민주는 그 표정을 못 본 척 삼각김밥을 받아들였다.
아홉 시가 넘자 단골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요일 아침이면 출근길에 세탁물을 맡기는 삼층 회계사무소의 김 대리가 와이셔츠 세 벌을 비닐에 넣어 들고 왔다가 닫힌 셔터를 보고 멈칫했다. 민주가 미안하다고, 오늘은 못 받는다고 말하려는 사이에 김 대리는 셔터 손잡이에 비닐을 걸어놓고 "사장님 천천히 하세요" 한마디만 남기고 갔다. 그 뒤로도 셔터 앞에는 세탁물 봉지가 하나씩 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닫힌 가게 앞에 빨래를 맡기고 가는 것이 이 골목의 방식인 것처럼. 민주는 그 봉지들을 하나씩 안으로 들이지도 못한 채 셔터 옆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바라만 봤다.
"민주야, 이게 무슨 꼴이야."
박명자가 등장한 건 아홉 시 반쯤이었다. 분홍색 등산 조끼에 머리에는 선바이저, 손에는 종이컵 커피. 명자는 골목 입구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릴 만큼 크게 말하며 걸어왔다. 민주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지만 동시에 묘하게 긴장이 풀리는 것도 느꼈다. 이 사람이 오면 귀찮아지지만, 적어도 혼자 셔터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은 아니게 된다.
"명자 이모, 위에서 내려온 물이에요. 천장 방수가 다 삭았나 봐."
"내가 그 얘기를 몇 번을 했어. 작년에도 장마 전에 방수 다시 해야 한다고, 상가 회의 때 내가 분명히——"
명자는 말을 하다 말고 셔터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녹이 손끝에 묻자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건물 공용 부분에서 내려온 거면 네 잘못이 아니야."
민주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명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술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상가 건물 보험이 있을 거야. 내가 관리사무소 생길 때 같이 들어놨으니까. 근데 그게 세입자 피해까지 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고. 약관이라는 게 그때 읽어봤는데 글씨가 어찌나 깨알 같던지. 하여튼 서류 한번 찾아봐. 임대차 할 때 네가 뭘 받았는지도."
명자는 이 말을 마치 반찬 레시피를 알려주듯 가볍게 던졌지만, 민주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개의 서랍이 동시에 열리는 느낌이었다. 임대차계약서. 상가보험. 세입자 배상. 들어본 적은 있지만 한 번도 직접 펼쳐본 적 없는 단어들. 민주는 세탁소를 열고 칠 년 동안 보험료를 꼬박 냈지만, 정작 그 보험이 무엇을 어디까지 감싸주는지 확인한 적이 없었다. 보험증권이 어디 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엄마 그거 집 서랍장 위에 파일 있잖아. 노란색 클리어파일."
준수가 불쑥 말했다. 민주가 놀라서 쳐다보자 준수는 시선을 피했다.
"그냥 지난번에 뭐 찾다가 봤어."
민주는 아들이 뭘 찾다가 그 파일을 봤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준수에게 집에 가서 그 파일 좀 가져와 달라고 했다. 준수는 대답 대신 비닐봉지를 민주에게 건네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김밥과 커피가 든 봉지는 아직 따뜻했다.
명자가 준수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저 녀석 참, 무뚝뚝한 게 꼭 아버지를 닮았어." 민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자는 눈치를 채고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오늘 하루 장사 못 하는 건 확실하고, 내일도 글렀을 수 있어. 수리업체 전화는 했어?"
"아까 했는데 오후에나 온다고."
"에이, 이 동네 업체들이 다 그래. 내가 아는 데 하나 있는데——"
명자가 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지는 동안 민주는 셔터에 걸린 세탁물 봉지들을 다시 바라봤다. 저 안에는 누군가의 면접 정장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 교복이 있을 수도 있다. 자기가 문을 열지 못하면 저 옷들의 주인도 하루가 틀어진다. 세탁소라는 게 그런 곳이었다. 대단할 것 없지만 없으면 바로 티가 나는, 동네의 심장 박동 같은 가게.
준수가 돌아온 건 사십 분쯤 뒤였다. 노란색 클리어파일을 들고 왔는데, 파일 안에는 임대차계약서 사본, 세탁소 화재보험 증권, 상가관리비 고지서 몇 장이 들어 있었다. 민주가 플라스틱 의자 위에서 서류를 한 장씩 넘기는 동안 준수는 옆에 쪼그려 앉아 함께 들여다봤다.
"엄마, 여기 이거. 화재 및 기타 재해로 인한 영업 손실 보상이라고 적혀 있는데."
민주는 준수가 가리킨 줄을 읽었다. 글씨가 작았고 단서가 많았다. '건물 구조체의 하자로 인한 수해는 건물주 보험의 적용 범위에 해당할 수 있으며', '세입자의 동산 피해는 별도 특약 가입 여부에 따라'——문장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조건이 튀어나왔다. 민주는 이해되는 부분과 이해되지 않는 부분의 경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이걸로 뭐가 되는 거야?" 민주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몰라. 근데 적어도 전화 한 통은 해볼 수 있잖아."
준수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툭 던지는 투였지만, 서류를 넘기는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민주는 그걸 봤다. 이 아이가 몰래 아르바이트를 늘리고 있다는 걸 어제 젖은 장부 사이에 끼어 있던 편의점 급여명세서로 알게 됐을 때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했다. 말하고 싶은 것들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민주는 그것들을 전부 삼키고, 대신 아들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커피나 한 잔 더 사 와. 이모한테도."
"이모 아니고 할머니지." 준수가 작게 웃었다.
"야, 내가 들었어!" 명자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소리쳤다.
그 순간 민주는 웃었다. 셔터는 여전히 닫혀 있고 바닥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지만, 이 골목의 오전 공기에는 커피 냄새와 사람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오늘 하루 매출은 제로다. 내일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서류 한 장을 펼쳐놓고 나니, 아무것도 모른 채 막막하기만 했던 삼십 분 전과는 기분이 달랐다. 대비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저 뭔가 터졌을 때 꺼내볼 수 있는 종이 한 장, 전화 한 통, 그리고 옆에서 함께 읽어주는 사람.
민주는 클리어파일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상가 관리사무소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는 동안 셔터 앞에 걸린 세탁물 봉지 위로 삼월의 바람이 지나갔다. 봉지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마치 기다려줄 테니 천천히 하라는 듯이.
그때 명자가 전화를 끊고 민주에게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민주야. 사실 이 건물 방수 공사, 삼 년 전에 해야 했어. 상가 적립금으로 하기로 했는데 그때 다른 데 쓰고 미뤄진 거야. 내가 건물주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닌데——그래도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민주는 명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참견 많고 입이 가벼운 이 사람이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조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명자의 눈가에 잔주름이 깊었다. 미안함인지, 걱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명자 이모. 그 얘기는 셔터 고치고 나서 해요. 지금은 일단——" 민주는 전화기를 귀에 대며 말을 끊었다. 관리사무소에서 전화를 받았다. 민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단했다. 세탁소 '해오름' 강민주입니다. 누수 피해 건으로 전화드렸는데요. 상가 공용 부분 보험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어서요.
준수가 커피 세 캔을 들고 골목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전화기를 붙들고 서류를 한 손에 든 채 셔터 앞에 서 있었다. 닫힌 셔터 위에 걸린 세탁물 봉지들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고 있었다. 준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장면을 잠시 바라봤다. 엄마가 작아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너져 보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