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빗소리가 집 안까지 파고들었다. 강민주는 창문을 살짝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번엔 오래 올라 보네." 세탁소 2층에 붙은 작은 집, 지붕은 오십 년은 족히 넘었고, 비 올 땐 항상 기왓장 사이로 습기 같은 게 스며들었다. 민주는 수세미 대신 수건을 창틀 아래 깔았고, 준수는 그런 엄마를 보며 물었다. "왜 매번 그 자리에 수건을 깔아요?" 민주는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그 수건이 안 깔리면 오늘 손님 옷 젖는다." 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빗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건, 집 안 곳곳에서 ‘뚝, 뚝’ 하고 떨어지는 물방울이었다.
세탁소 셔터를 여는 소리와 함께 명자가 우산도 없이 뛰어왔다. "민주야! 저 아래 물탱크 위에 빗물 받아두면 어쩌라고! 내일부터 빨래 물 아낄 수 있다며!" 민주는 웃으며 "선배, 그거 세수할 때 쓰면 모발 끊어져요"라고 했다. 명자는 "나는 머리털도 없는데 끊길 게 뭐가 있어!" 하며 터벅터벅 들어왔다. 둘이서 수건과 페트병을 동원해 누수 지점을 막는 동안, 준수는 가게 안쪽 책상 정리를 하고 있었다. 평소엔 책상 근처도 잘 안 오는 애였는데, 오늘은 유독 조용히, 침착하게 서류 더미를 넘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뚝 하고 책상 위에 떨어진 물방울이 장부 위에 박혔다. 준수가 재빨리 장부를 들어 올렸지만, 모서리부터 젖어 있었다. 종이가 축축해지자 글씨는 번졌고, 잉크는 물을 따라 흘러내렸다. 준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간이 깊게 주름졌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엄마, 장부 왜 이렇게 젖어 있냐고 안 물어보면 되냐고?"
민주는 뒤돌아보며 "뭐? 저기 누수 되는 거 몰라서 그래?" 했지만, 준수의 눈빛이 이상했다. 걱정이 아니라 분노 같기도 하고, 실망 같기도 했다. "이거… 회계장부 아니냐. 세금 신고용이고, 저번에 국세청에서 확인하라고 하던 거… 다 젖었잖아." 민주는 손을 뻗어 장부를 받으며 "다시 정리하면 되지 뭐 큰일 나냐"고 했고, 준수는 "다시 정리가 안 된다는 거 몰라요? 수기로 썼잖아, 손 글씨로!"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명자가 조용히 말했다. "저거… 전기 세금도 겸해서 쓰는 거 아니었어?" 준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수입 지출 다 여기에 기록돼요. 아빠 병원비, 대출 이자, 세탁기 수리비, 우리 월세… 전부 이거 하나였어요." 민주는 장부를 내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수건을 찾으러 갔다 왔지만, 준수는 이미 장부를 책상 서랍 깊숙이 밀어넣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비는 세차게 쏟아졌다. 민주는 세탁기 두 대를 바꿔 돌리며 생각했다. 준수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장부가 젖는 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매번 대충 정리해서 내면 돌아왔던 일들이었다. 그런데 그건, 세금보다 더 중요한 걸 의미하는 건지 몰랐다. 준수는 어제 밤 늦게까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가 대출 심사를 위해 제출할 가계부를 만들고 있다는 걸 민주는 몰랐다.
식탁에서 저녁을 먹을 때, 명자가 전날 먹은 김밥을 나눠줬다. "우리 집 김밥은 기운 나게 해." 민주는 웃으며 "그거 지난달 맛집 컬럼에도 났던 거 아니야?" 했고, 준수는 김치만 먹으며 말이 없었다. 민주는 "준수야, 장부는 다시 쓰면 되지, 걱정하지 마"라고 했고, 준수는 "다시 쓰는 게 그렇게 쉬워요?" 하고 눈을 들었다. "엄마는 항상 ‘다 되겠지’ 하잖아. 근데 안 되는 거 다 계산해놓고 싶은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민주는 젓가락을 멈췄다. 그 말이 아들의 등 뒤에 짊어진 무게를 비로소 느끼게 했다. 준수는 19세, 대학생. 등록금은 할부로 내고, 방학 동안 세탁소 뒤에서 옷을 개는 것도 모자라, 밤에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민주는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아들이 퇴근 후 방에서 책을 펴는 시간은 거의 없었고, 피곤에 지친 얼굴은 늘 ‘괜찮아’로 포장돼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민주는 준수의 방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하는 목소리는 피곤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민주는 침대 모서리에 앉으며 "내가 뭘 몰랐는지 좀 알게 됐어"라고 했고, 준수는 침묵했다. 민주는 장부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거로 네 대출 서류 쓰려고 했다는 거 몰랐어. 미안해." 준수는 조용히 말했다. "난 그냥, 엄마보다 먼저 뭔가를 준비하고 싶었어요."
그 말을 들은 민주의 눈이 스르르 젖어들었다. 오랜만에,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걱정을 느꼈다. 아들의 어깨가 왜 그렇게 굳어 있는지도, 왜 대화마다 뾰족한 말끝을 내밀었는지도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럼… 앞으로는 같이 정리하자. 손 글씨로 된 거 다시 타이핑해보자." 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웃음이 입가에 스쳤다. "근데 엄마, 손글씨가 너무 예쁘지 않아서 OCR 인식 안 될 수도 있어요." 민주는 킥킥 웃었다. "그럼 내가 예쁘게 다시 써줄게. 국어 선생님도 아닌데."
명자는 저녁 내내 민주네 집 문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왜 자꾸 와?" 하자, "너희 집 뚝뚝 소리가 내 집까지 들려서 불안하네. 누수 심하면 보험 체크도 해봐야지." 민주는 "그거 나도 알아" 하며 툴툴댔지만, 말 끝에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험은 평소엔 기억나지 않는 단어였다. 그러나 장부가 젖은 오늘, 그 단어는 공기처럼 습기를 머금고 있었고, 민주는 처음으로 그 무게를 실감했다.
밤늦게, 민주는 부엌에서 말린 장부를 펼쳤다. 수건에 둘둘 말아 말렸지만, 여전히 모서리가 찌그러져 있었고, 숫자는 일부 흐려져 있었다. 그녀는 붉은 펜을 들고, 젖기 전의 숫자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얼마 전 아버지 병원비, 지난달 전기료, 어제 산 드럼 청소제 값… 하나씩 적어내려가는 손이 느려졌다. 그것들이 모이면, 준수의 대출 승인 여부가 결정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준수는 문을 살짝 열고 그 모습을 봤다. 민주는 등에 납작하게 붙은 스웨터를 입은 채, 헤드셋도 없이 혼자서 삐삐 소리 나는 시계 소리만 들으며 숫자를 적고 있었다. 준수는 조용히 커피를 내려 건넸고, 민주는 고맙다는 말 대신 "이거 다 내 자식 덕에 정리하는 거다" 하고 웃었다.
그날 밤, 민주는 꿈을 꿨다. 장부가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준수는 그 물 위를 작은 보트로 건너고 있었다. 민주는 따라가려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깨고 나서 그녀는 벽난로 위에 놓인 보험 문서 봉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먼지가 약간 쌓여 있었고, 봉투 끈은 풀려 있었다.
이튿날 아침, 민주는 준수에게 말했다. "이번엔 내가 도와줄게. 다음엔 네가 나한테 도와달라 하면 말해." 준수는 눈을 굴리며 "그 말, 제가 듣기 전에 써놨어야죠" 했고, 민주는 "됐어. 너보다 내가 잘생기게 태어났다니까" 하고 답했다. 명자는 그 광경을 보고 "쟤들 이제 좀 말 잘하게 됐네" 하며 만족한 듯 가게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 민주는 오래된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아내가 사망한 후, 남편이 남긴 메모였다. '민주야, 돈보다 중요한 건, 말하는 거야. 넌 다 해낼 수 있지만,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 민주는 그 쪽지를 준수 방 문 손잡이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저녁, 준수는 그 쪽지를 보고 무릎을 꿇고 앉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