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는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졌다. 알람보다 먼저, 몸이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세탁소를 연 지 십이 년째, 이 시간이면 이미 스팀 다리미의 예열 버튼을 누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도 누울 곳은 거실 소파였고, 손에 쥔 건 다리미가 아니라 어젯밤 준수가 식탁 위에 펼쳐놓은 보험 증권 사본이었다. 접힌 자국이 너무 깊어서 글자가 끊겨 보였다. 민주는 그 끊어진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스스로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엌에서 물 끓이는 소리가 났다. 준수가 벌써 일어난 모양이었다. 대학 새내기 주제에 엄마보다 먼저 부엌에 서 있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민주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증권 사본을 재빨리 쿠션 밑에 밀어 넣었다. 아들한테 보험 서류 들여다보다 걸리는 건 어쩐지, 일기장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커피 탈 거야?" 준수가 등을 보인 채 물었다. 목소리에 잠이 덜 깬 기색이 묻어 있었다.
"아니, 숭늉 끓여. 입이 텁텁해서."
"숭늉이 어딨어. 누룽지가 없는데."
"그럼 보리차라도."
준수는 대답 대신 찬장 아래에서 보리차 팩을 꺼냈다. 민주는 아들의 손등에 밴드가 붙어 있는 걸 봤지만 묻지 않았다. 물류창고 아르바이트 흔적이라는 걸 안다. 안다는 걸 아들도 안다. 그래도 서로 말하지 않는다. 이 집의 규칙 같은 것이었다. 모르는 척이 배려가 되는 순간들.
보리차가 우러나는 동안 민주는 냉장고 문에 붙은 메모를 다시 읽었다. 어제 명자가 써 준 것이었다. 삐뚤빼뚤한 볼펜 글씨로 '건물 관리비 문의 — 상가 관리사무소 전화번호'와 '보험 접수는 사진부터'라는 두 줄이 적혀 있었다. 명자의 참견에는 늘 이런 식의 실용적인 꼬리표가 붙었다. 잔소리 같다가도 나중에 보면 가장 필요한 말만 골라서 한 셈이었다.
아홉 시가 되자 민주는 세탁소 앞에 섰다. 셔터는 여전히 내려져 있었다. 어제 건물 관리인이 붙여 놓은 안내문 — '누수 보수 공사 중, 일시 휴업' — 이 바람에 한쪽 모서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민주는 테이프를 꺼내 다시 붙이다가, 옆 가게 꽃집 사장 윤 씨와 눈이 마주쳤다.
"민주 씨, 오늘도 못 여는 거야?"
"보수가 끝나야 열죠 뭐."
"이틀이면 하루치 매출이 아니라 이틀치네. 단골들 전화 안 와?"
민주는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졌다. 부재중 전화 일곱 통. 문자 네 개. 전부 세탁물 맡기러 온다는 내용이었다. 한 통은 결혼식 정장을 급하게 맡겨야 한다는 단골이었고, 또 한 통은 이불 빨래를 약속한 요양원이었다. 민주는 한 통도 회신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가게를 열 수가 없어요'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서였다.
"명자 언니가 건물주잖아. 보수비 이야기는 했어?" 윤 씨가 물통에 물을 채우며 넌지시 물었다.
"명자 언니도 복잡한 것 같더라고요. 건물이 오래돼서 배관 전체를 손봐야 할 수도 있대요."
"그건 건물주 부담 아냐?"
"그게……" 민주는 말끝을 흐렸다. 명자가 어제 슬쩍 흘린 말이 걸렸다. 상가 건물 화재보험에 특약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누수가 화재가 아니니 해당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 보험이라는 단어가 명자의 입에서 나왔을 때, 민주는 처음으로 그 단어를 '남의 일'이 아닌 '내 일'로 들었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점심때 명자가 김밥 두 줄과 종이 봉투 하나를 들고 왔다. 종이 봉투 안에는 상가 관리 규약 사본과 건물 종합보험 약관 요약본이 들어 있었다. 민주는 김밥보다 그 종이 뭉치를 먼저 집어 들었다.
"언니, 이거 어디서 났어요?"
"관리사무소에 가서 달라니까 주더라. 그 사람들도 지금 정신없어. 우리 건물만 터진 게 아니라 옆 동도 배관이 낡았다고 난리야." 명자는 김밥을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민주야, 나도 솔직히 말할게. 이 건물 배관 문제, 한두 해 된 게 아니야. 내가 삼 년 전에 관리비에서 적립금 쌓자고 했을 때 다들 싫다고 했잖아. 그때 했으면 지금 이 지경은 아닌데."
민주는 약관 요약본을 펼쳤다. '건물 내부 급배수 설비로 인한 수손(水損) 피해'라는 항목 옆에 명자가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조건과 면책 사항이 빼곡했다. 민주는 글자를 읽다가 멈췄다. 읽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한 줄의 밑줄이 명자가 어젯밤에 혼자 앉아서 형광펜을 들고 읽었다는 뜻이라는 걸 깨달아서였다.
"언니, 고마워요."
"고마운 건 나중에 해. 일단 사진 찍은 거 있지? 가게 안 피해 사진. 그거 날짜 확인하고, 관리사무소에 접수한 기록이랑 같이 모아 놔. 보험이 되든 안 되든, 기록은 남겨야 돼."
민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험이 되든 안 되든.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확실한 답이 아니라 '일단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뜻이었으니까.
저녁, 준수가 식탁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뭔가를 검색하고 있었다. 민주가 뒤에서 슬쩍 보니 화면에는 '상가 누수 피해 보상 절차'라는 검색어가 떠 있었다. 준수는 엄마의 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탭을 닫았지만, 민주는 이미 봤다.
"준수야."
"응."
"아까 그 보험 증권 사본, 어디서 찾은 거야?"
준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서랍 맨 아래. 아빠 서류 사이에 끼어 있었어."
그 말에 민주의 손이 멈췄다. 아빠 서류. 이혼한 지 사 년이 됐는데, 서류는 아직 그 서랍에 있었다. 민주는 자기가 그걸 안 치운 게 게을러서인지, 아니면 치우고 싶지 않아서인지 스스로도 모르겠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 보험 증권에 빈칸이 있더라." 준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특약란이 비어 있어. 기본만 들어 있는 것 같은데, 누수 같은 거 커버되는 건지 모르겠어."
"……나도 몰라."
"알아봐야 하지 않아?"
민주는 아들을 봤다. 열아홉 살 아이가 보험 특약란의 빈칸을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싫었다. 싫다기보다는, 미안했다. 이런 걸 이 나이에 알아야 하는 아이가.
"알아볼게. 내가."
준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한 잔 따르며 말했다. "엄마, 셔터 앞에 오늘도 누가 세탁물 걸어 놨더라. 비닐에 싸서. 메모도 붙어 있었는데, '천천히 하세요'라고."
민주는 대답 대신 우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목이 따뜻해야 할 것 같았는데 차가운 우유가 오히려 정신을 맑게 했다. 내일은 셔터를 올릴 수 있을까. 아직 모른다. 배관 보수가 언제 끝날지도, 보험이 이 피해를 어디까지 안아줄 수 있는지도.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어제보다 덜 무서웠다. 빈칸이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채울 방향이 생긴 것 같았으니까.
밤 열한 시, 민주는 냉장고 문의 메모 옆에 새 메모를 한 장 붙였다. '내일 할 일 — 피해 사진 정리, 보험사 연락, 관리사무소 접수 확인.' 볼펜을 내려놓으려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준수 밴드 갈아 붙이기.' 그 메모를 붙이고 돌아서는데 거실 불이 꺼진 소파 위에서 보험 증권 사본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쿠션 밑에 밀어 넣은 건 분명 자기였는데, 누군가 다시 꺼내 본 흔적이었다. 민주는 그걸 집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숨긴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집의 누수가 가르쳐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