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전 아홉 시 삼 분.
사무실 복합기가 예열음도 없이 바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가 새벽부터 켜 둔 모양이었다. 늦은 밤의 기계음이 아직 공기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서하는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고 모니터를 켰다. 화면이 완전히 밝아지기도 전에 옆 칸에서 지우가 고개를 내밀었다.
"오늘 배당지 나왔어. 확인했어?"
"아직요."
지우는 출력된 종이 한 장을 책상 모서리에 툭 올려두고 갔다.
배당지는 A4 두 장짜리였다. 첫 장 오른쪽 상단, 인쇄된 글자 위로 빨간 볼펜 선이 하나 지나가 있었다. 처음엔 인쇄 오류인가 싶었다. 그런데 가까이 당겨 보니 달랐다. 손으로 그은 선이었다. 잉크가 종이 결에 조금 번져 있었다.
밑줄이 그어진 항목은 하나였다.
'담당 심사역: 강도윤.'
서하는 종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얇은 종이가 괜히 축축하게 느껴졌다. 도윤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홉 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드문 일이었다.
서하는 배당지를 뒤집어 놓았다.
오전 회의는 짧았다. 짧아서 더 숨이 막혔다.
차진혁 수석이 회의실 문을 직접 열고 들어오자, 팀원들은 거의 동시에 등을 폈다.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희게 내려앉은 회의실이었다. 지우가 연필을 내려놓는 소리만 괜히 또렷했다.
차진혁은 앉지 않았다. 화이트보드 앞에 선 채 팔짱을 끼고 팀을 한 번 훑었다.
"미지급 소송 건 배당, 다 확인했죠."
질문처럼 들렸지만 질문은 아니었다.
"기한은 삼십 일입니다. 협상 여지는 없습니다. 내부 검토 보고서는 이번 주 안에 초안이 올라와야 합니다. 중간 점검은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수진이 옆에서 볼펜 뚜껑을 탁 닫았다.
서하는 무릎 위 메모지에 '이번 주 / 초안 / 직접'이라고 적었다가, 곧바로 줄을 그었다. 지워도 남는 말이 있었다.
차진혁은 더 덧붙이지 않았다. 회의실을 나가며 문을 직접 당겨 닫았다.
"덜컹."
그 소리 뒤로 잠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말한 건 지우였다.
"'직접 한다'는 말, 좋은 뜻 아닌 거 알죠?"
"좋은 뜻이었던 적이 있었나?"
수진이 낮게 받았다.
지우가 피식 웃었다.
"있지. 남의 팀 얘기일 때."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가 금방 꺼졌다.
수진이 서하를 봤다.
"서하 씨, 배당지 봤어요?"
"네."
"빨간 줄도?"
서하는 대답이 반 박자 늦었다.
"봤어요."
"누가 그은 건지 알아요?"
그걸 왜 수진 씨도 알고 있지.
그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멈췄다.
"그게... 혹시 알아요?"
수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메모지를 반으로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요."
나중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지금보다 덜 바쁠 때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조심해야 할 때처럼 들렸다.
도윤이 사무실에 들어온 건 열 시가 다 돼서였다. 코트 단추도 풀지 않은 채 자기 자리에 앉더니 모니터부터 켰다. 늘 먼저 와 있던 사람이 그렇게 들어오니, 사무실 공기가 한 번 어긋나는 느낌이 났다.
서하는 힐끗 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도윤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배당지인지, 다른 자료인지 각도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물어볼 타이밍을 세 번쯤 놓쳤다.
왜 늦으셨어요.
배당지 보셨어요.
빨간 줄은요.
셋 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열한 시 무렵, 서하는 민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추가 서류 기한이 내일 오후까지예요. 병원 진단서 사본 준비되셨나요?'
답장은 생각보다 빨랐다.
'아 그거. 오늘 아침에 병원 갔다 왔어요. 팩스로 보내면 돼요?'
서하는 바로 팩스 번호를 보냈다. 안도감이 먼저 올라왔고, 그 뒤에 긴장이 따라붙었다. 한 건이 정리되는 게 아니었다. 민주 건 마감이 소송 건 일정과 정면으로 겹쳐 있었다.
점심은 편의점으로 때웠다. 복도에는 데운 국물 냄새와 복사 용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지우가 삼각김밥 두 개를 들고 와 서하 옆에 털썩 앉았다.
"있잖아. 배당지 얘기."
"왜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어요?"
지우는 포장을 뜯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도윤 형 이름 위에 그어진 거잖아. 그게 인쇄된 거라고 생각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응. 나도."
지우가 한 입 베어 물고 말했다.
"문제는 출력 시각이야. 어젯밤 열한 시 사십칠 분. 다 퇴근하고 난 뒤."
서하는 손에 쥔 삼각김밥을 내려놨다.
"그럼 누군가 사무실에 있었다는 거잖아요."
지우는 대답 대신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그게 사실상 대답이었다.
"우리 팀 야근 수당도 안 찍히는 시간에 누가 그렇게 성실하냐."
농담처럼 말했는데, 둘 다 웃지 못했다.
오후에 오승우가 팀 쪽 복도를 지나갔다. 서류를 들고 걷다가 서하 자리 앞에서 잠깐 멈췄다. 목례도 아니고, 그냥 지나치기에도 애매한 각도였다.
"민주 씨 서류 오늘 들어오죠?"
서하는 키보드 위 손을 멈췄다.
"내일 오후까지 기한입니다."
"아, 맞다."
오승우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건, 기한 놓치면 뒤로 밀리는 거 아시죠? 이번 소송 건이랑 타이밍 겹치면 좀 복잡해져서."
복잡해진다는 말이 너무 매끈했다. 경고처럼 들리는데 표정은 친절했다.
"알고 있어요."
오승우는 더 말하지 않고 지나갔다.
서하는 다시 화면을 봤다. 민주 건 접수 화면, 소송 건 배당 화면. 탭 두 개가 나란히 열려 있었다. 전혀 다른 일 같았는데, 이상하게 같은 냄새가 났다.
두 화면 사이 공통점은 하나였다.
로그가 비는 구간.
민주 건은 접수 다음 날 오전, 소송 건은 배당 전날 밤.
서하는 마우스를 그 항목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 지우에게 먼저 보여줄지, 도윤에게 먼저 물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손끝만 괜히 바빴다.
퇴근 무렵이 돼도 도윤은 자리에 있었다. 코트는 여전히 입은 채였다. 오전보다 어깨가 조금 내려가 있었고, 모니터 불빛이 얼굴 한쪽만 희게 비췄다.
서하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한 번쯤은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배당지의 빨간 줄, 열한 시 사십칠 분, 늦은 출근.
입이 열리기 직전, 도윤이 먼저 말했다.
"민주 씨 서류, 내일 오전 중으로 올리세요."
"네."
"오후는 안 됩니다."
짧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왜요.
라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도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알겠어요."
서하는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 위에는 아버지의 부재중 전화 기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젯밤에도 못 눌렀고, 오늘도 손이 가지 않았다. 서하는 잠깐 그 이름을 보다가 다시 화면을 껐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동안 오전의 말들이 다시 떠올랐다. 어젯밤 열한 시 사십칠 분. 퇴근 후 사무실. 배당지 위의 빨간 선. 그리고 오후가 아니라 오전을 고집한 도윤의 말.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서하는 이상하게도 도윤의 마지막 말보다 그 말 사이의 침묵이 더 오래 남는다는 걸 알았다.
내일 오전이 지나면, 그 침묵에도 이름이 붙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