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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2화]

다시 열린 메일함, 먼저 뻗은 손

작성: 2026.04.02 15:01 조회수: 45
창작물 안내
[AI 생성물] 본 소설의 내용과 표지는 인공지능(AI) 모델을 통해 기획 및 작성된 허구의 창작물입니다.
이 콘텐츠는 AI가 창작한 장기 연재소설입니다. 실제 인물이나 사건과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오전 여덟 시 십칠 분.

프린터가 컥, 하고 종이를 씹었다.

내부감사팀 사무실이 잠깐 숨을 죽였다. 누구도 먼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모니터 불빛만 얼굴 위에 얇게 내려앉았다. 이런 곳에서는 기계가 멈춰도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 이겸은 그 공기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윤해진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제가 볼게요."

짧았다. 군더더기도 없었다.

해진은 프린터 덮개를 열고 구겨진 종이를 잡아당겼다. 손끝에 검은 잉크가 묻었다. 그는 잠깐 손을 내려다보더니 바지 옆선에 문질러 닦았다. 그 사소한 버릇까지도 이겸의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제일 먼저 찍힌다는 거였다.

이겸은 식은 커피를 들었다. 입안에 쓴맛이 퍼졌다. 모니터 한쪽에 띄워 둔 메일함에는 아직도 굵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감사 일정 협의 요청 - 전략실]

어제 온 메일이었다.

예전의 그는 그걸 열었다. 읽었고, 회신했고, 절차대로 움직였다. 그 뒤로 감사 일정은 이상할 만큼 정확하게 새어 나갔다. 누가 먼저 자료를 치우는지, 누가 미리 입을 맞추는지, 너무 매끈해서 오히려 역겨울 정도로.

이번에는 열지 않았다.

읽음 표시 하나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서랍을 열어 작은 수첩을 꺼냈다. 어젯밤 적어 둔 이름 셋. 설명도 날짜도 없었다. 이름만 있었다. 죽던 날 손에 쥐고 있던 장부 조각처럼, 지금은 그 정도면 됐다.

오전 열 시를 조금 넘기자 내선 전화가 울렸다.

"한 부장님, 전략실에서 연결됐습니다."

총무 김 사원의 목소리였다.

이겸의 손이 수화기 위에서 잠깐 멈췄다.

전화.

예전 생에는 없던 순서였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연결하세요."

잠깐의 공백 뒤,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한 부장, 바쁘신가요. 어제 메일 드렸는데 회신이 없어서요."

장승민.

낮고 정중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늘 계산이 들어 있었다. 부탁처럼 들리게 말하고, 거절하면 상대가 먼저 무례해지게 만드는 사람.

이겸은 창밖을 봤다. 맞은편 빌딩 유리벽에 사무실 형광등이 희미하게 비쳤다.

"확인은 했습니다. 팀 일정 정리 중이라 답이 늦었습니다."

"아, 물론이죠. 감사팀이 바쁘신 건 압니다. 다만 저희도 사전 준비가 필요해서요. 다음 주 일정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 먼저 공유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그 한 단어가 얇고 차갑게 박혔다.

이겸은 수화기 선을 손가락에 한 번 감았다가 풀었다.

"확정되면 절차대로 전달드리겠습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절차대로."

장승민이 따라 말했다.

웃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좋습니다. 한 부장답네요. 기다리겠습니다."

뚝.

통화가 끊겼다.

이겸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동안 손을 떼지 않았다. 기다리겠다는 말이 귓가에 남았다. 기다리는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이미 다른 길을 찾고 있는 사람의 말이었다.

하루 빠르다.

그 사실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훑었다.

회귀는 지도를 다시 받는 일이 아니었다. 불에 그슬린 지도 위에서 남은 길자국 몇 개를 더듬는 일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길 하나가 벌써 틀어졌다.

점심시간 직전, 해진이 자료철을 들고 이겸 자리 앞에 섰다.

"부장님, 2019년 4분기 계열사 거래 내역 원본이 재무팀에 있답니다. 제가 직접 받아올까요?"

이겸이 고개를 들었다.

해진의 눈은 아직 맑았다. 사람을 믿고, 일은 하면 된다고 여기는 눈. 그래서 더 위험했다.

"아니요. 그건 내가 갈게요."

해진은 바로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가면 더 빠릅니다. 담당자랑 아는 사이예요."

그 말에 이겸의 시선이 잠깐 굳었다.

아는 사이라서.

바로 그게 문제였다.

누가 움직였는지, 누구를 통해 자료를 찾는지, 그런 사소한 흔적이 전략실로 흘러가는 회사였다. 해진이 재무팀에 얼굴을 비추는 순간, 감사팀이 어디를 파고 있는지 신호가 된다.

하지만 그걸 지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설명하는 순간 해진도 감시망의 모양을 알게 된다. 알면 더 깊이 들어오고, 더 빨리 표적이 된다.

이겸은 짧게 잘랐다.

"그래서 안 됩니다."

해진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알겠습니다."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자료철을 가슴 쪽으로 한 번 끌어안듯 고쳐 잡고 돌아섰다. 갑옷이 스치는 소리처럼 서류 모서리가 셔츠를 긁었다. 그 뒷모습이 이상하게 무거워 보였다.

이겸은 식은 커피를 마셨다. 혀끝이 텁텁했다. 지키려는 방식이 늘 옳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은 미움받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오후에는 외부 용역 계약서 묶음을 검토했다. 계열사 데이터 정합성 점검, 비용 분석, 프로젝트 지원. 이름만 바꿔 달았을 뿐, 결국 돈의 흐름을 정리하는 일들이었다.

몇 장 넘기던 손이 한 줄에서 멈췄다.

수행 인력.

민가온.

이겸은 문서를 다시 끌어당겼다. 이름을 한 번 더 읽었다. 오타가 아니었다. 소속은 독립 컨설턴트. 계약 시작일은 두 달 전.

예전 생에서 민가온이라는 이름을 들은 건 훨씬 뒤였다. 자료가 반쯤 지워지고, 누군가 입을 닫고, 이미 너무 많은 게 늦은 다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류 끝에 너무 멀쩡하게 찍혀 있었다.

두 달 전부터.

이겸은 계약서를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기억보다 먼저 등장한 이름. 단서이기도 했고, 경고이기도 했다.

판이 바뀌고 있다.

그가 움직여서 바뀐 건지, 처음부터 다른 손이 끼어든 건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 사무실은 하나둘 비었다. 형광등 아래 남은 사람은 몇 없었다. 해진은 끝까지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탁, 탁, 탁.

일정한 소리가 빈 사무실에 남았다. 훈련장 흙먼지 대신 복사기 먼지와 종이 냄새가 떠도는 전장 같았다.

이겸이 코트를 집어 들자 해진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예전 같으면 먼저 웃었을 애였다.

오늘은 아니었다.

"먼저 들어가요."

해진은 잠깐 입술을 달싹였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네."

그 한 글자가 유난히 멀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겸은 수첩을 꺼냈다. 이름 셋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민가온. 계열사 용역. 두 달 전부터.

펜 끝이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 아래, 더 작게 덧붙였다.

해진 - 재무팀 인맥 노출 금지.

스스로 적고도 기분이 더러웠다. 사람 이름 옆에 금지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보호와 관리의 경계가 흐려진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는 망설이는 쪽이 먼저 잘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은 비어 있었다.

거울처럼 닦인 금속 벽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아직 살아 있는 얼굴. 그런데 눈만은 한 번 죽은 사람의 것이었다.

문이 닫히는 동안, 이겸은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장승민은 메일 보류를 이미 신호로 읽었다. 민가온은 기억보다 먼저 나타났다. 해진은 설명 없는 지시에 처음으로 거리를 뒀다.

바깥의 적보다 안쪽의 균열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와 차 문을 열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

이겸은 화면을 내려다봤다. 한 번, 두 번. 진동이 짧게 끊겼다. 받지 않았다.

대신 번호를 저장하지 않고 수첩 맨 뒤에 적었다. 발신지는 서초구.

서초.

전략실 사람들, 로펌, 외부 자문, 그리고 필요할 때만 얼굴을 드러내는 전달책들이 자주 엉키는 동네였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낮게 울렸다. 백미러 속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지만, 누군가 먼저 손을 뻗어 온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민가온.

모르는 번호.

그리고 장승민의 마지막 말.

"기다리겠습니다."

이겸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기다리긴."

낮게 뱉은 말이 차 안에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순서를 뺏기지 않는다.

그는 차를 천천히 빼냈다. 내일은 이 번호의 주인을 확인할 것이다. 바로 전화하지는 않는다. 먼저 알아보고, 먼저 고르고, 먼저 자른다.

살아남는 쪽은 늘 그 순서를 지킨 쪽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 순서 끝에 누구를 남겨 둘 수 있을지, 아직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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