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량 창고 문이 열리자 냄새가 먼저 밀려 나왔다. 쥐오줌과 썩은 짚, 오래 눅은 곰팡이 냄새였다. 하르트가 든 등잔불이 흔들리자 빈 선반들이 길게 그림자를 끌었다. 엘리안은 창고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췄다. 천장 들보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지붕 틈이었다. 성벽보다 먼저, 이곳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곡물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하르트는 대답 대신 장부를 내밀었다. 낡은 가죽 표지가 손끝에 거칠게 걸렸다. 엘리안이 장부를 펼치자 숫자보다 괄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반출, 담보, 반출, 담보. 남은 양은 적었고, 빠져나간 이유는 지나치게 또렷했다.
"아버지께서 직접 서명하신 겁니까?"
"예, 도련님. 공증까지 받았습니다."
하르트가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다만 날짜가 이상한 것이 두 건 있습니다."
엘리안의 시선이 올라갔다. 하르트는 입술을 다문 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때 선반 밑에서 쥐 한 마리가 튀어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작은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창고 입구에는 세라 헬몬이 기대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자세는 느슨해 보여도 눈빛은 풀려 있지 않았다. 아침 햇빛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얼굴에는 밤을 새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내 사람들 보름도 못 버팁니다."
세라가 창고 안을 훑으며 말했다.
"처음 들은 것보다 더 비었군요."
"계약 조건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 말하십시오."
"바꾸는 게 아닙니다. 확인하는 거죠."
세라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장화 밑창이 먼지를 밀었다.
"로벨 영주께서 병력 오십을 원하신다면, 나는 그 오십이 굶지 않을 보장을 원합니다. 명예니 충성이니 하는 말은 빈 배 앞에서 오래 못 갑니다."
엘리안은 장부를 덮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 사실이 목에 걸렸다.
"밀렌 마을에 아직 거래할 상인이 있습니다. 이틀 안에 보리와 소금을 구하겠습니다."
그는 창고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대신 당신 부하 오십 중 열은 성벽 보수에, 열은 창고 지붕 수리에 붙이십시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병력만이 아니라 일손입니다."
세라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귀족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건 드문데요."
엘리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귀족이 아닙니다. 서자지. 체면으로 배를 채워 본 적도, 체면으로 벽을 세워 본 적도 없습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세라가 짧게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호의도 아니었다. 다만 처음 보는 것을 본 사람의 웃음에 가까웠다.
점심 무렵, 하르트는 이상한 날짜가 적힌 문서를 두 장 골라 가져왔다. 하나는 아버지가 병상에 누운 지 사흘 뒤의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영지를 비운 기간과 겹쳤다. 엘리안은 촛불 아래에서 서명을 오래 들여다봤다. 필체는 아버지의 것과 거의 같았다. 거의. 그 한 글자가 자꾸 눈에 걸렸다.
공증 도장은 진짜였다. 그래서 더 나빴다.
오후가 되자 엘리안은 직접 말을 탔다. 마구간 안은 젖은 짚 냄새와 말 땀 냄새로 눅눅했다. 안장을 조이는 가죽 끈이 삐걱거렸고, 쇠고리가 부딪히며 짧게 울었다. 하르트가 따라나서려 하자 엘리안이 손을 들었다.
"장부를 다시 보십시오. 이상한 건 저 두 장으로 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혼자 보내기엔 위험합니다."
"그럼 세라 헬몬에게 부탁하시죠."
엘리안이 고삐를 쥐며 덧붙였다.
"그게 싫으면 직접 따라오시든가."
하르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옆에서 말안장을 툭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세라였다. 그녀는 이미 준비를 마친 얼굴로 말 옆에 서 있었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소."
밀렌 마을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었다. 흙길은 마른 듯 보여도 군데군데 바퀴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말발굽이 닿을 때마다 먼지가 일었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길의 절반쯤 지났을 때, 세라가 앞을 본 채 입을 열었다.
"어젯밤 북쪽 성벽 너머에서 연기가 올랐습니다."
엘리안의 손이 고삐를 당겼다.
"언제였지?"
"이경 무렵. 내 부하 하나가 봤어요. 작은 불이었고 금방 꺼졌습니다. 산적이 피운 불치고는 짧았고, 신호라기엔 방향이 묘했죠."
세라가 말머리를 조금 틀며 덧붙였다.
"북쪽 고개 쪽이었습니다. 그 길은 베도르 공작 영지로 이어집니다."
엘리안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갑옷 안쪽에서 셔츠가 등에 달라붙었다. 말발굽 소리만 둔하게 이어졌다. 세라가 그 침묵을 읽은 듯 물었다.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
짧게 끊긴 대답 뒤에 숨이 한 번 섞였다.
"하지만 이제는 모른 척할 수 없겠군."
밀렌 마을 상인은 예상보다 더 완강했다. 보리 이십 포대와 소금을 내주는 대신 다음 수확기 세금 일부 면제를 요구했다. 엘리안은 그 자리에서 승낙하지 않았다. 영지 세금은 영주 혼자 입으로 깎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인도 그걸 알고 있었다. 눈빛이 지나치게 침착했다.
엘리안은 세금 일부 면제가 아니라 유예를 제안했다. 상인은 한참 계산기를 두드리듯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결국 보리 십구 포대로 물러섰다. 한 포대가 깎였을 뿐인데도, 그 한 포대가 목줄처럼 느껴졌다.
세라는 협상 내내 문 앞에 서 있었다. 한마디도 보태지 않았다. 대신 돌아오는 길에 툭 던지듯 말했다.
"그 상인, 작년에 베도르 공작가 상단에 물건을 댔습니다."
엘리안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북쪽 고개의 연기, 이상한 날짜의 서명, 베도르와 거래한 상인. 아직은 점이었다. 그런데 점들이 한쪽으로만 기울고 있었다. 우연이라기엔 방향이 너무 같았다.
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어 있었다. 하르트는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문서 한 장이 따로 놓여 있었다.
"다시 확인했습니다."
하르트의 목소리가 낮았다.
"이상한 날짜 두 건 중 하나는 군량 담보 계약입니다. 그런데 담보를 받은 쪽의 이름이 지워져 있습니다. 긁어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엘리안은 문서를 집어 들었다. 종이 끝이 손가락을 스쳤다. 촛불 가까이 가져가자 긁힌 자국이 비늘처럼 일어났다. 잉크를 칼끝으로 긁어낸 자리였다. 급히 지운 흔적은 아니었다. 들키지 않게 지우려다 오히려 더 선명해진 상처였다.
"이 계약, 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영주님께서 제게 보여 주신 적도 없습니다."
엘리안은 문서를 접어 품에 넣었다. 종이가 가슴 안쪽에서 얇게 눌렸다. 그런데 그 무게가 빈 창고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밤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었다. 멀리 성벽 돌 사이에서 바람 우는 소리가 났다. 엘리안은 의자에 앉지 않고 창가에 섰다. 북쪽 고개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불빛도, 연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꺼림칙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성벽 밖에서 불을 올렸고, 누군가는 장부 안에서 이름을 지웠다. 무너진 것은 돌벽만이 아니었다. 로벨가의 안쪽에도 이미 틈이 나 있었다.
엘리안은 창틀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손바닥에 박혔다. 내일은 성벽을 메워야 했다. 창고도 채워야 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누가 이 틈을 냈는지 찾아야 했다.
성벽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막을 수 있어도 사람 손으로 낸 균열은 그렇게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그 사실만은 이제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