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가 언덕을 넘자 로벨 성이 보였다.
엘리안은 창문을 밀어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5년 전 떠날 때도 성벽은 성한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는 버티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북쪽 망루 둘은 반쯤 주저앉았고, 외벽 한쪽은 아예 무너져 돌무더기가 되어 있었다. 성문 위에 걸려 있어야 할 로벨가의 깃발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만 빈 자리를 핥고 지나갔다.
"도련님."
마부석의 하르트 렌발이 낮게 불렀다.
엘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집사장의 등은 여전히 곧았지만, 눈가의 주름은 전보다 깊어져 있었다.
"사람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스무 명 남짓입니다. 늙은 하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칼을 쥘 만한 자는 없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엘리안은 더 묻지 않았다. 한때 로벨 영지는 기사 열다섯과 보병 백 명을 거느리던 변경백령이었다. 지금은 성문을 닫을 손조차 모자란다는 뜻이었다.
마차가 멈췄다. 녹슨 쇠사슬이 바람에 덜그럭거렸다. 엘리안은 땅에 내려 성문을 올려다봤다. 돌 틈에는 이끼가 끼어 있었고, 망루 끝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하르트가 문짝을 밀었다.
끼익.
문은 반쯤만 열렸다. 안마당에는 잡초가 허리 높이까지 자라 있었고, 훈련장 한쪽에는 부러진 창과 깨진 방패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흙먼지가 바람에 일어 발목에 감겼다.
"군량 창고는요?"
"비었습니다. 작년 겨울 이후로 세금도 끊겼습니다."
엘리안은 안마당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마른 풀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본관 앞에는 늙은 하인 몇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모두 고개는 숙였지만, 시선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반가움보다 경계가 먼저였다.
"로벨가의 후계자, 엘리안 로벨입니다."
낮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줄 끝에서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서자라더니."
엘리안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복도는 어두웠다. 촛대는 듬성듬성 켜져 있었고, 벽에 걸린 초상화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기울어져 있었다. 아버지의 초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하르트가 잠시 멈췄다.
"석 달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엘리안의 걸음이 끊겼다.
"장례는."
"간소하게 치렀습니다. 조문객은 없었습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졌다. 로벨가의 변경백이 조문객 하나 없이 묻혔다. 그 말은 곧, 이 가문이 왕국에서 이미 끝난 이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서재 문을 열자 곰팡이 냄새가 훅 끼쳤다. 책장은 반쯤 비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르트가 맨 위의 장을 밀어 보였다.
"세금 독촉장과 채권 통지서입니다. 총액은 금화 오천 닢입니다."
엘리안은 서류를 넘겼다. 베도르 공작가, 헬리온 상단, 왕실 재무부. 익숙한 이름들이 줄줄이 박혀 있었다. 전쟁을 준비하며 진 빚이었다. 전쟁은 졌고, 빚만 남았다.
"갚을 길은?"
"없습니다."
하르트는 담담했다. 그래서 더 쓰렸다.
엘리안은 창밖을 봤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무너진 성벽 너머로 어둠이 천천히 번졌다.
"오늘은 성에서 묵겠습니다. 내일 아침, 영지를 직접 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밤이 깊었다.
방은 냉골이었다. 벽난로는 비어 있었고, 이불에서는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하르트는 땔나무가 부족하다고 했다. 숲은 남아 있는데 베어 올 사람이 없다고.
엘리안은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5년 전, 아버지는 그를 수도로 보냈다. 왕실 기사단 시험을 보라고 했다. 서자라도 검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고. 엘리안은 시험을 통과했다. 하지만 입단식 전날, 로벨가 패전 소식이 퍼졌다. 왕실은 곧장 손을 뗐다. 몰락한 가문의 서자는 기사단에 둘 수 없다고 했다.
그 뒤의 5년은 길지 않았다. 그는 용병으로 살았고, 호위 기사로도 일했다. 돈이 떨어지면 짐꾼 노릇도 했다. 쇠사슬 갑옷은 늘 무거웠고, 젖은 마구간의 공기는 늘 비슷했다. 피 냄새는 오래 맡으면 익숙해진다. 수모도 그랬다.
석 달 전, 하르트의 편지가 왔다. 아버지가 죽었고, 로벨가에 다른 상속자는 없다고.
돌아오라고.
바람 소리가 들렸다.
엘리안은 눈을 떴다.
아니었다.
발소리였다.
그는 곧장 몸을 일으켜 검을 집었다. 맨발로 복도를 지나 안마당으로 나갔다. 달빛 아래, 무너진 성벽 너머로 그림자 하나가 스쳤다. 사람 키만 한 형체였다. 멈춰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누구냐!"
대답은 없었다.
그림자가 사라졌다.
엘리안은 돌무더기를 밟고 성벽 쪽으로 뛰었다. 부서진 돌이 발밑에서 미끄러졌다. 밖을 내다보자 숲 사이로 횃불 하나가 멀어지고 있었다.
"도련님!"
하르트가 외투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채 따라왔다.
"누군가 성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르트는 숲을 노려보다가 입술을 굳혔다.
"산적일 겁니다. 요즘 자주 어른거립니다."
"산적이 성을 살핍니까?"
"굶주리면 뭐든 합니다."
"병력도 없는데 어떻게 막죠?"
하르트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막지 못합니다. 성문을 잠그고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안은 말없이 숲을 바라봤다. 북방의 첫 방어선이던 영지가 이제는 산적의 눈치나 보는 처지가 됐다.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일 아침, 남은 주민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예, 도련님."
아침이 밝자 엘리안은 낡은 가죽 갑옷을 걸쳤다. 어깨 부분이 조금 조였다. 5년 전보다 몸이 달라진 탓이었다. 갑옷이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거칠게 들렸다.
하르트가 빵과 물을 내왔다. 빵은 딱딱했고, 한쪽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났다. 엘리안은 그냥 씹어 삼켰다.
"창고부터 보겠습니다."
창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선반에는 먼지만 쌓여 있었고, 구석에서 쥐 한 마리가 튀어나와 달아났다.
"작년 수확은?"
"절반도 못 건졌습니다. 농민들이 많이 떠났습니다."
군량이 없으면 병력을 모을 수 없다. 병력이 없으면 수확을 지킬 수 없다. 뻔한 말인데, 폐허 한가운데에서는 그 뻔한 말이 칼날처럼 선명했다.
"남은 주민은 어디 있습니까?"
"마을 두 곳입니다. 각각 열 가구쯤 됩니다."
"가죠."
성 밖 길은 오래 방치된 티가 났다. 수레 자국은 흐릿했고, 풀은 무성했다. 숲은 조용했지만 엘리안은 고삐를 쥔 손을 늦추지 않았다. 어젯밤의 그림자가 아직 목덜미에 붙어 있었다.
마을은 초가집 몇 채가 모여 있는 작은 터였다. 밭 절반은 버려져 있었고, 남은 밭에서는 노인 하나가 혼자 쟁기를 밀고 있었다. 엘리안이 다가가자 노인이 손을 멈췄다.
"로벨가에서 왔습니다."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금 걷으러 왔소?"
"아닙니다. 영주로 왔습니다."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영주? 산적이 와도 아무도 안 왔는데. 세금만 챙겨 가던 영주 말이오?"
엘리안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말고삐를 쥔 손가락만 조금 움직였다. 노인의 말은 거칠었지만 틀리지 않았다.
"앞으로는 다르게 하겠습니다."
"그 말, 전에 들었소."
노인은 다시 밭을 갈았다. 마른 흙이 갈라지며 뒤집혔다.
돌아오는 길에 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민들은 이미 로벨가를 믿지 않습니다."
"압니다."
짧게 답한 뒤 엘리안은 무너진 성벽을 바라봤다. 저 돌을 다시 쌓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사람을 모으려면 군량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믿게 만들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었다.
성문 앞에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가죽 갑옷 위로 회색늑대 문장이 박혀 있었다. 허리에는 짧은 검, 등에는 활. 팔짱을 낀 자세는 편안해 보였지만 빈틈이 없었다. 그녀는 엘리안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로벨가 후계자가 당신이오?"
엘리안은 말에서 내렸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회색늑대 용병단의 세라 헬몬이오. 단장 명의로 왔소."
"무슨 일입니까?"
세라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봉인은 거칠었지만 손때가 적었다. 급히 보낸 편지는 아니었다. 준비된 제안이었다.
엘리안은 봉인을 뜯었다.
'로벨 영주에게. 세라 헬몬. 거래를 제안한다. 군량과 땅을 주면 병력을 준다. 답을 기다린다.'
짧았다. 그래서 더 노골적이었다.
엘리안이 편지를 접자 세라가 물었다.
"답은?"
엘리안은 잠시 뒤를 돌아봤다. 무너진 성벽, 텅 빈 창고, 잡초가 뒤덮은 훈련장. 그리고 어젯밤 숲에서 성을 훑던 횃불.
그는 다시 세라를 봤다.
"단장을 만나겠습니다."
세라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현명하군. 다만 우리도 공짜로 칼을 빌려주진 않소."
그 말은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엘리안은 그 사실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이 여자는 거짓 위로를 팔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칼을 사려면 값을 치러야 한다. 지금 로벨가에는 내줄 것도, 잃을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엘리안은 무너진 성문을 올려다봤다. 돌 틈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 바람 끝에서,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누군가의 시선이 다시 한번 목덜미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