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회의실 문을 열자 강도윤이 이미 앉아 있었다. 불 꺼진 복도 쪽 창으로 가로등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테이블 위 종이컵을 길게 비추고 있었다. 커피는 식은 지 오래됐는지 표면에 얇은 막이 생겨 있었다. 서하는 맞은편 의자를 빼며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오후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말이 입 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담당자 칸이 비어 있었다는 그 문장을 먼저 꺼내도 되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앉아."
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오늘 시스템에서 뭘 봤는지 알아. LT-2024-0387. 최초 배당 이력, 담당자 공란."
서하의 어깨가 굳었다. 그제야 도윤의 시선이 서하를 향했다. 형광등도 켜지지 않은 방인데도 그가 피곤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확인하려고 오후 내내 밖에 있었어."
"확인하셨어요?"
"장기보상팀 쪽 기록은 열람 자체가 막혀 있어. 권한 문제가 아니야. 해당 구간 로그가 통째로 빠져 있더라."
도윤은 종이컵을 천천히 한 번 돌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묻는 거다. 오승우 팀장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서하는 숨을 한 번 골랐다. 점심시간, 오승우가 건넨 말투가 떠올랐다. 자기 팀에서 검토하다 넘어간 건이고, 정리해 둔 자료가 있으니 필요하면 주겠다고 했다. 친절했다. 너무 친절해서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자기 팀에서 검토하다 넘어간 건이라고 했어요. 자료를 주겠다고도 했고요."
생각보다 단단한 목소리가 나왔다. 도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받았어?"
"아뇨. 아직이요."
"받지 마."
짧았다. 명령이라기보다 경고에 가까운 톤이었다. 서하는 왜냐고 묻고 싶었지만, 도윤의 표정이 그 질문을 막았다. 잠깐의 침묵 뒤에 도윤이 덧붙였다.
"당장은 아무것도 하지 마. 내일 전체 회의 끝나고 다시 얘기하자."
그게 전부였다. 더 설명하지 않는 사람과 더 묻지 못하는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식은 커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서하가 소회의실을 나온 건 밤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복도 자판기 앞에서 구겨진 천 원짜리를 세 번이나 펴고 있을 때, 한지우가 나타났다.
"윤서하, 자판기랑 싸우고 있었어?"
지우는 자기 교통카드를 찍더니 캔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를 서하 손에 쥐여 줬다.
"도윤 선배랑 무슨 얘기했는지 안 물어볼게. 대신 한 가지만."
캔을 따며 지우가 말했다.
"네 표정이 그러면 나도 불안해지니까, 좀만 풀어."
서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가 금세 포기했다.
"선배, 오승우 팀장님 어떤 분이에요?"
지우의 손이 잠깐 멈췄다.
"갑자기?"
"오늘 점심에 좀 이상해서요."
지우는 캔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복도 끝을 봤다.
"유능해. 사교적이고, 회식 때 노래도 잘 불러."
한 박자 뒤에 덧붙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근데 그 사람이 잘해줄 때가 제일 무서워."
서하는 차가운 캔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밤공기보다 그 한마디가 더 서늘하게 남았다.
다음 날 아침, 8층 대회의실. 서하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의자 절반이 차 있었다. 도윤은 맨 앞줄 구석에서 서류를 넘기고 있었고, 지우는 뒷줄에서 손을 흔들었다. 민수진은 서하 옆 빈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작게 속삭였다.
"오늘 분위기 이상하지 않아?"
서하가 되묻기도 전에 회의실 문이 열렸다.
차진혁이 들어왔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검은 정장이 주름 하나 없이 떨어졌다. 박성준 상무가 그 뒤를 따랐는데, 평소의 호탕한 걸음과 달리 입이 굳어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선 모습은 이상하게도 균형이 맞지 않았다. 상무가 한 발 뒤에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간결하게 하겠습니다."
차진혁은 스크린도 켜지 않은 채 말을 시작했다.
"LT-2024-0387 건. 미지급 쟁점 금액 4억 7천. 원고 측 변호사가 언론 접촉을 시작했다는 정황이 있고, 2심 기일은 다음 달 14일입니다."
숫자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회의실 공기가 한 겹씩 무거워졌다.
"이 건에서 회사가 지면 손해는 금전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담당 팀은 2주 안에 쟁점 정리 보고서와 내부 경위서를 올리세요. 일정은 조정 불가입니다."
차진혁의 시선이 천천히 회의실을 훑었다. 서하는 그 시선이 도윤에게 잠깐 멈추는 걸 봤다. 1초, 2초.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옮겨 갔다.
박성준 상무가 입을 열려는 듯 몸을 기울였지만, 차진혁이 먼저 서류를 덮었다.
"상무님, 추가 사항 있으시면 별도로 전달 부탁드립니다."
공손한 말투였지만 사실상 벽이었다. 박 상무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 뒷짐을 졌다. 서하 옆에서 수진이 볼펜을 꽉 쥐는 소리가 났다. 회의실 안의 공기는 차갑다 못해 딱딱했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보다, 누가 먼저 책임을 떠안을지가 더 중요해진 자리 같았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 서하는 도윤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도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선배, 2주면—"
"된다."
도윤이 잘라 말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감정이 없는 말처럼 들렸지만, 주먹 쥔 손등의 힘줄이 서하 눈에 들어왔다. 그 말이 자신을 다독이는 건지, 팀을 붙들어 매는 건지 서하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짧은 대답 하나에 이상하게 등이 곧게 펴졌다. 무섭다는 감정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멍하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서하는 구내식당 대신 편의점 삼각김밥을 사 들고 옥상 계단에 앉았다. 은별에게 보낼 카톡을 치다가 지웠다. 오늘 좀 힘들다는 문장이 괜히 유치하게 느껴졌다. 대신 아버지 이름이 적힌 연락처가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통화 기록은 18일 전이었다. 서하는 화면을 끄고 삼각김밥 비닐을 뜯었다. 밥알이 차가웠다.
계단 아래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승우였다.
"아, 여기 있었구나."
서하는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오승우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앉아 있어. 나도 바람 좀 쐬러 온 거야."
그는 서하에게서 한 칸 떨어진 계단에 앉더니 담배 대신 박하사탕을 꺼냈다.
"어제 내가 한 얘기, 부담됐으면 미안. 그냥 후배가 고생하는 거 보니까 도와주고 싶었어."
"아닙니다."
대답은 했지만 목소리가 자연스러웠는지는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오승우는 박하사탕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며 웃었다.
"진혁 수석님, 무서웠지? 근데 저 사람이 무서운 건 말이 아니라 기억력이야. 숫자 한 줄 틀리면 6개월 뒤에도 꺼내거든."
서하도 따라 웃었다. 웃지 않으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아서였다.
그 순간 오승우가 톤을 낮췄다.
"혹시 배당 이력 쪽에서 이상한 거 본 건 있어?"
서하의 손가락이 삼각김밥을 쥔 채 멈췄다. 머릿속에서 도윤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받지 마.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마.
서하는 삼각김밥 포장을 천천히 접으며 시선을 내렸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대답은 빨랐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선택이 들어 있었다. 오승우는 서하의 눈을 잠깐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르는 게 편할 수도 있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근데 알아야 할 때는 늦지 않게 와. 문은 열어 놓을게."
오승우가 사라진 뒤에도 서하는 계단 난간을 잡은 채 한참 서 있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도윤은 받지 말라고 했고, 오승우는 문을 열어 놓겠다고 했다. 두 문장 사이에 서하가 서 있었다. 어느 쪽이 자신을 지키는 말인지, 어느 쪽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말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방금 한 대답만큼은 분명했다. 적어도 오늘은 먼저 손을 내밀지 않기로 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수진이었다.
"민주 씨 건, 추가 서류 기한 이번 주 금요일까지래. 내가 연락할까, 네가 할래?"
서하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대답했다.
"제가 할게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이상하게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소송 건도, 내부 경위서도, TF 면담도 당장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민주 건은 달랐다. 지금 바로 전화하고, 지금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이었다. 서하는 계단을 내려오며 휴대폰 메모장에 필요한 서류를 빠르게 적었다. 흔들릴수록 순서를 먼저 잡으라는 수진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서하는 도윤 자리 뒤편 게시판에 새로 붙은 종이 한 장을 봤다.
'조직효율화 TF 1차 면담 일정 안내.'
면담 대상자 목록에 보상팀 전원의 이름이 있었다. 서하의 이름은 맨 아래였고, 면담 일자는 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그 바로 위에 강도윤의 이름이 있었고, 날짜는 이번 주 금요일이었다. 민주 건 추가 서류 기한과 같은 날이었다.
서하는 그 종이를 두 번 읽고 자리로 돌아갔다. 모니터를 켜자 소송 건 폴더와 민주 건 폴더가 나란히 떠 있었다. 어느 쪽을 먼저 열어야 하는지 잠깐 손이 멈췄다. 금요일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간이 둘로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지우가 서하 자리 옆을 스치듯 지나가며 포스트잇 한 장을 모니터 귀퉁이에 붙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서하가 포스트잇을 떼어 읽는 데 걸린 시간은 3초였다. 손이 멈췄다. 거기에는 딱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배당 이력 삭제, 두 번째 흔적 찾았어.'
서하는 포스트잇을 손바닥 안으로 접었다. 두 번째라는 말이 이상하게 더 서늘했다. 첫 번째 흔적은 서하가 봤다. 그렇다면 지우는 언제부터, 어디까지 파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오늘 옥상에서 오승우가 배당 이력을 물어본 건, 정말 우연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