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스름이 대나무 숲 끝에 엷게 걸릴 무렵, 나뭇가지 하나가 허공을 세 번 갈랐다.
첫째는 급했고, 둘째는 억눌렸으며, 셋째는 가까스로 이어 붙인 흐름이었다. 한소령의 발끝이 젖은 흙을 반 치쯤 밀어냈다. 보법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나, 마지막에 실린 힘이 손목으로 치우친 탓에 가지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도 끊어지지는 않았다. 세 초식이 하나의 숨으로 이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소령은 곧장 기뻐하지 못했다. 가슴 안쪽이 먼저 타들어 갔다. 억지로 눌러 붙인 기운이 뒤늦게 비명을 지르는 탓이었다.
“멈춰.”
대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앉아 있던 막리연이 낮게 말했다. 늘어진 자세와 달리 눈빛은 날이 서 있었다.
“지금 더 하면 잇는 게 아니라 찢는다.”
소령은 나뭇가지를 쥔 채 숨을 골랐다. 손바닥의 물집이 또 터졌는지 미끈한 감촉이 배어 나왔다. 사흘 전만 해도 2초식에서 기맥이 뒤틀려 주저앉았다. 오늘은 3초식까지 갔다. 분명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취보다 모자람이 먼저 보였다.
사부가 보여 주던 청명잔영검은 이렇지 않았다. 검 한 수가 지나가면 바람이 먼저 길을 내주었고, 보는 사람은 그제야 검이 움직였음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것은 검이 아니라 버티는 몸이었다. 억지로 밀어붙인 흔적이 너무 선명했다.
막리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령의 손에서 나뭇가지를 빼앗았다.
“3초식까지는 됐다. 하지만 네가 방금 세운 건 검세가 아니라 오기야.”
그는 나뭇가지를 한 번 툭 쳐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팔뚝으로 찍어 누를 거면 나무꾼이 더 낫지. 검은 힘이 아니라 결을 타야 한다.”
소령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네가 묻는 건 길이 아니라 지름길이다.”
막리연은 물통을 던지듯 내밀었다.
“마셔. 기맥이 진흙탕인데 거기다 수레를 더 얹겠다는 얼굴이네.”
소령은 물을 받아 들고도 바로 마시지 않았다. 막리연의 말은 늘 맞는 듯하면서도 어딘가를 감추고 있었다. 가르치는 사람의 말이라기보다, 이미 한 번 같은 실패를 겪어 본 사람의 경고처럼 들릴 때가 많았다. 그게 더 거슬렸다.
“왜 3초식까지만 보십니까.”
막리연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네가 아직 그릇이 안 되니까.”
툭 던진 말이었지만, 소령은 그 한마디에 목 안이 서늘해졌다. 그릇. 사부가 남긴 말에도 있던 단어였다. 묻고 싶었으나 막리연은 이미 등을 돌리고 객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팽노인네 국밥 식기 전에 와. 안 먹으면 오늘은 검보다 국자부터 맞는다.”
객잔 부엌에는 된장과 사골 냄새가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 팽노는 솥뚜껑을 열지도 않은 채 불길을 조절하고 있었다. 장작 타는 소리와 국물 끓는 소리가 묘하게 일정했다. 소령은 그 손을 볼 때마다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저건 밥 짓는 손이 아니다. 칼을 오래 쥐어 본 손이다.
“앉아라.”
팽노가 짧게 말했다.
셋은 낮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소령 앞에 놓인 국밥에는 어김없이 파가 수북했다. 한 번 골라내는 걸 들킨 뒤로는 오히려 더 많아졌다. 팽노식 호의였다. 거칠고 설명이 없으며, 거절도 통하지 않는.
막리연이 숟가락을 들다 말고 불쑥 입을 열었다.
“팽노인. 그 양반이 맡긴 게 정말 이 녀석뿐이었소?”
소령의 손이 멈췄다.
팽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를 한 번 씹고 삼킨 뒤에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부엌 안의 공기가 한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뭘 캐내고 싶은 거냐.”
“도현진이 사람만 보냈는지, 아니면 다른 것도 남겼는지.”
사부의 이름이 나오자 소령의 등이 저릿했다. 검결이 새겨진 자리가 화끈거리는 것은 착각일 터였다. 하지만 ‘다른 것’이라는 말은 그 착각을 너무 쉽게 진짜처럼 만들었다.
팽노가 소령을 한 번 보았다. 그 시선은 위로도 연민도 아니었다. 마치 아직 열어서는 안 될 칼집의 상태를 살피는 눈빛 같았다.
“물건은 없었다.”
짧고 단단한 대답이었다.
“대신 말은 있었지. ‘아이가 찾아가거든 그릇을 쥐여 줘라. 검은 내가 새겼으니 그릇만 있으면 된다.’ 그게 전부다.”
소령은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사부의 마지막 말에도 그릇이 있었다. 검을 세우되 사람을 세워라. 그런데 팽노에게 남긴 말도 그릇이었다. 같은 단어인데 뜻은 더 멀어졌다.
“그릇이 뭡니까.”
이번에는 참지 않고 물었다.
팽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된장국 김이 셋 사이로 천천히 올랐다. 막리연도 말을 보태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팽노였다.
“나도 모른다.”
“정말입니까?”
소령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날카롭게 튀어나갔다. 막리연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팽노는 화내지 않았다. 다만 숟가락을 다시 들며 말했다.
“모른다. 네 사부는 원래 중요한 말일수록 절반만 했어.”
“절반만 들은 사람은 남은 절반 때문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말을 뱉고 나서야 소령은 제 목소리에 실린 감정을 알아차렸다. 원망이었다. 사부를 향한 것인지, 눈앞의 노인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향한 것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팽노의 손이 멈췄다. 막리연이 소령을 흘끗 보았다. 부엌 안이 조용해졌다.
“그래서 네가 살아남아야 한다.”
팽노가 낮게 말했다.
“남은 절반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찾아내는 거다.”
소령은 더 묻지 못했다. 국밥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파 향이 알싸하게 올라왔고,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속은 데워졌는데 가슴은 오히려 차가워졌다. 3초식을 이은 기쁨은 그 자리에서 식어 버렸다.
아침 장사가 시작되자 소령은 그릇을 닦고 물을 길었다. 손은 익숙하게 움직였지만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전반부 서른여섯 초식 중 겨우 셋. 후반부는 그림자조차 없다. 이 속도로는 복수는커녕 곽진해의 하수인 하나 제대로 막아설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두레박을 끌어올리던 손이 잠시 멈췄다.
‘느리다.’
짧고 날카로운 생각이 스쳤다.
그때 뒷문이 벌컥 열렸다.
“한소령!”
담여화가 약재 보따리를 안은 채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이른 시각인데도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달려온 기색이 역력했다.
“현성 약재시장이 다음 달 초에 열린대. 우리 어머니 약재도 구해야 하고, 네가 전에 물어본 지혈초도 거기서나 제대로 구할 수 있대.”
말은 평소처럼 빠르게 쏟아냈지만, 눈은 소령의 손을 먼저 훑었다. 새로 터진 물집과 붉게 벗겨진 손바닥을 본 것이다.
“또 했지, 새벽에.”
소령이 손을 뒤로 감췄다. 담여화는 혀를 찼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를 낮췄다.
“그보다 더 이상한 게 있어.”
소령의 시선이 곧장 올라갔다.
“어제 찻집 앞에 있던 사내 기억하지? 손목에 뱀 비늘 같은 호완 찬 놈. 오늘 아침 약재상 골목에서 또 봤어. 우리 가게 쪽을 보고 있었어. 내가 눈 마주치니까 바로 사라졌고.”
소령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뱀 비늘 호완. 혈사문의 표식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었다. 그것도 객잔과 담여화의 동선을 따라붙듯 나타났다.
“확실해?”
“내가 그런 걸 헷갈릴 것 같아?”
담여화가 발끈했다가, 이내 소령의 얼굴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너, 알고 있지. 저게 그냥 수상한 장사치가 아니라는 거.”
소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담여화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서 나한테 숨긴 거야?”
그 말에는 서운함이 먼저 실려 있었다. 소령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 담여화를 위험에서 떼어 놓으려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혈사문의 시선이 이 객잔을 훑고 있다면, 모른 척한다고 비켜 갈 일이 아니었다.
“여화야.”
소령이 낮게 불렀다.
담여화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보따리 끈을 더 세게 쥐었다. 소령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는 선택해야 했다. 계속 숨기며 혼자 움직일지, 아니면 위험을 알면서도 함께 갈지.
“현성 가는 길, 같이 가자.”
담여화의 눈이 커졌다.
“뭐?”
“혼자 보내지 않겠다.”
“네가 날 지키겠다고?”
말끝이 날카로웠다. 비웃음이 아니라 화였다. 소령은 그 화를 피하지 않았다.
“그래.”
“네 몸도 제대로 못 지키면서?”
정곡이었다. 소령의 손끝이 잠깐 굳었다. 새벽마다 기맥이 뒤틀리는 몸, 3초식에 겨우 매달린 검, 아직 정체도 모르는 적. 담여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래도 가야 해.”
소령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숨는 쪽이 더 위험해.”
담여화는 한참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재수 없게 진지하네.”
툭 내뱉은 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알았어. 대신 나한테 또 숨기면 그땐 내가 먼저 널 버리고 갈 거야.”
소령은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가 맹세처럼 들렸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아침 내내 흔들리던 마음이 오히려 한곳으로 모였다. 분노와 조급함으로 들끓던 속이, 처음으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해가 기울 무렵, 소령은 우물가에서 숫돌에 식칼을 갈았다. 팽노가 시킨 일이었다. 칼날이 돌 위를 미끄러질 때마다 쇠 냄새와 물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일정한 마찰음 속에서 아침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아이가 찾아가거든 그릇을 쥐여 줘라.’
‘검은 내가 새겼으니 그릇만 있으면 된다.’
검결은 등에 있다. 그렇다면 그릇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물건일까, 심법일까, 아니면 사람일까. 팽노는 모른다고 했다. 정말 모르는지, 아니면 아직 줄 때가 아니라고 여기는지 알 수 없었다.
칼을 들고 부엌으로 향하던 소령의 발이 처마 밑에서 멈췄다.
팽노와 막리연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는 술병도 없고 웃음도 없었다. 대신 낮고 눌린 목소리만 오갔다. 소령은 기척을 죽였다.
“……4초식부터는 안 된다.”
팽노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더 낮고 단단했다.
“그건 네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야.”
막리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르치지 않으면 더 빨리 죽소.”
“억지로 열면 그 자리에서 터진다.”
“그래서 계속 국밥이나 먹이며 숨길 겁니까?”
순간 소령의 손에 쥔 식칼 자루가 미끄러질 뻔했다. 막리연의 말에는 조롱이 아니라 조급함이 실려 있었다. 팽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 조급함으로 망친 게 하나뿐인 줄 아느냐.”
막리연의 턱이 굳었다. 그 말은 칼처럼 정확히 꽂힌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막리연이었다.
“그래서 그릇이 필요한 거 아니오.”
소령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팽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소령은 더 숨길 수 없음을 깨닫고 앞으로 나섰다. 마당의 볕이 세 사람 사이에 길게 드리웠다.
“칼 갈았습니다.”
팽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칼을 받아 들었다. 그러나 막리연의 시선은 소령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들었느냐고 묻는 눈이었다. 소령은 모른 척하지 않았다. 대신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셋 사이에 말 없는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때였다.
담장 밖에서 아주 짧은 마찰음이 스쳤다. 기와 끝을 밟고 몸을 틀 때 나는, 무공을 익힌 자의 가벼운 실수였다. 소령의 고개가 번개처럼 돌아갔다. 처마 그림자 너머, 담장 위로 무엇인가가 찰나 반짝였다. 뱀 비늘을 엮은 듯한 검은 호완이었다.
“누구냐!”
소령이 외치며 몸을 날리려는 순간, 팽노의 손이 먼저 그의 어깨를 눌렀다. 노인의 손은 마른데도 쇠갈고리처럼 무거웠다. 한 치도 나가지 못한 소령이 이를 악물었다.
“놓으십시오!”
“지금 뛰면 미끼를 문다.”
팽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막리연은 이미 처마 끝으로 몸을 틀고 있었다. 그의 발이 움직이기 직전, 담장 밖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작은 물건 하나가 안마당으로 떨어졌다.
툭.
먼지 위를 한 바퀴 구른 것은 검은 천에 감긴 짧은 비도였다. 비도 손잡이에는 붉은 실이 감겨 있었고, 그 끝에 접힌 쪽지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아무도 곧장 손대지 않았다.
소령은 비도보다 쪽지를 먼저 보았다. 붉은 실 끝에 묻은 검붉은 얼룩이 아직 마르지 않은 듯 번들거렸다. 피였다.
팽노의 손이 소령의 어깨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막리연의 눈빛이 처음으로 노골적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소령은 알았다. 현성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에게 떠밀려 길 위에 올라섰다는 것을.
문제는 하나였다.
저 쪽지가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담여화를 겨눈 경고인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피가 채 마르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그 답을 오래 미뤄 두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