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물을 길어 올리던 때, 두레박 줄이 툭 끊어졌다.
소령은 우물 안으로 사라진 나무 두레박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소매를 걷었다. 새 줄을 가져와 매듭을 짓는 손끝이 삼줄에 쓸려 따가웠지만, 그런 아픔은 이미 익숙했다. 세 해였다. 파서진 취선객잔에서 물을 긷고, 그릇을 닦고, 국밥을 나르는 데 세 해가 흘렀다. 새 줄을 우물틀에 단단히 감아 매고 두레박을 다시 내리자 차가운 물이 찰랑이며 올라왔다. 그제야 등 뒤로 팽노의 기척이 닿았다.
"줄 끊어졌으면 말을 해."
팽노는 부엌에서 쓰는 큰 칼을 어깨에 걸친 채 서 있었다. 새벽부터 양지머리를 손질하던 참이었는지 앞치마에는 핏물이 얼룩져 있었다. 소령은 고개를 숙였다.
"금방 고쳤습니다."
팽노는 더 묻지 않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작 타는 냄새와 뼈를 우리는 누린내가 뒤섞여 마당까지 흘러왔다. 취선객잔의 아침은 늘 그랬다. 말은 적고, 일은 많았다. 그 사이를 국밥 끓는 냄새가 메웠다.
오전 장이 서자 손님이 몰렸다. 파서진은 변방이었지만 서쪽 관도와 북쪽 산길이 만나는 길목이라, 장날이면 행상과 짐꾼, 간혹 강호인의 행색을 한 자들까지 뒤섞였다. 소령은 잔을 닦으며 창 너머 장터를 훑었다. 약재상 처마 밑에는 담여화가 앉아 마른 약초를 고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처럼 마른 풀잎이 흩어졌고, 담여화는 그때마다 투덜거리며 주워 담았다. 평범한 풍경이었다. 소령은 그 평범함이 좋았다. 동시에 그것이 끝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감각도 떨쳐 내지 못했다.
정오가 지나서였다. 객잔 문이 열리며 술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정확히는 술과 먼지, 기름 밴 가죽 냄새가 뒤엉킨 바람이었다. 소령은 고개를 들었다. 문턱을 넘는 사내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흐트러짐이었다. 낡은 회색 도포의 매듭은 반쯤 풀려 있었고, 허리에 찬 검은 칼집에 비해 걸음걸이는 지나치게 느긋했다. 나이는 서른 안팎, 턱에는 며칠 치 수염이 거칠게 올라와 있었지만 눈매만은 또렷했다. 그 눈이 객잔 안을 한 번 훑고는 창가 자리를 잡았다.
"술 있나."
소령은 잔을 내려놓고 다가갔다.
"탁주와 소흥주가 있습니다. 식사는 국밥과 만두가 있습니다."
"소흥주. 두 병."
사내가 말을 잘랐다. 소령은 묵묵히 술병 두 개와 잔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사내는 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로 한 모금 들이켰다. 소령이 돌아서려는데, 등 뒤로 느긋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야, 꼬마. 이 객잔 방은 몇 칸이야."
"셋입니다."
"비어 있는 건?"
"두 칸입니다."
"하나 잡아 둬. 열흘은 묵을 거야."
소령의 발이 멈췄다. 열흘. 장사꾼이 아닌 자가 파서진에 열흘씩 묵겠다는 일은 드물었다.
"숙박비는 하루 은 두 푼입니다. 식사까지 포함하면—"
"외상은 안 되나."
사내가 웃었다. 대놓고 당당한 웃음이었다. 소령은 눈을 내리깔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팽노는 국자를 저으며 짧게 말했다.
"받아."
소령은 되묻지 않았다. 팽노의 판단을 거스른 적은 없었다. 다만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보통 같으면 얼굴부터 보고 값을 정했을 노인이었다.
그날 오후, 사내는 소흥주 네 병을 더 비웠다. 소령이 빈 병을 치우러 갈 때마다 그는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날씨, 그다음에는 장터 이야기. 그리고 세 번째에는 소령의 손을 보았다.
"접시 닦는 손치고 굳은살이 특이하네."
소령의 동작이 미세하게 굳었다. 오른손 호구에서 검지 첫마디까지 이어진 딱딱한 살갗의 띠. 그것은 그릇이 아니라 검자루가 남기는 흔적이었다. 소령은 병을 쟁반에 올렸다.
"장작을 많이 팹니다."
"그래? 장작 패는 굳은살은 여기가 아니라 여기에 박히는데."
사내가 자기 손바닥의 다른 부위를 가리키며 고개를 기울였다. 소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쟁반을 들고 돌아서는 등에 사내의 시선이 찔리듯 꽂혔다. 술에 절은 나그네의 시선이 아니었다. 사람의 껍질 아래를 더듬어 보는 자의 눈이었다.
저녁 무렵, 담여화가 객잔에 들렀다. 어머니에게 줄 약재를 사러 장에 왔다가, 늘 그렇듯 팽노에게 만두 한 접시를 얻어먹으러 온 것이었다. 소령이 만두를 내오자 담여화는 턱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저 사람 뭐야. 아까부터 혼자 마시면서 객잔 안을 계속 훑어보던데."
"투숙객입니다."
"강호인이겠지? 칼 찼잖아."
담여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소령은 대꾸 없이 물잔을 담여화 앞에 놓았다. 담여화가 눈을 좁혔다.
"야, 한소령. 내가 괜히 묻는 줄 알아? 요즘 네 표정이 영 아니야."
"압니다."
"알면 좀 말도 해."
소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손의 굳은살을 읽어 낸 사내의 눈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담여화는 그런 소령을 한참 보다가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됐어. 대신 저 사람 가까이 가지는 마. 술 취한 척하는 자들이 더 성가시더라."
핀잔 같은 말이었지만 끝에 남은 온기는 분명했다. 소령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만큼은 가슴을 짓누르던 경계가 조금 느슨해졌다. 그러나 창가 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다시 등을 스치자, 그 작은 안도는 금세 사라졌다.
밤이 깊었다. 마지막 손님이 떠나고 소령은 탁자를 닦았다. 스스로를 막리연이라 밝힌 사내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처마 아래 걸상에 앉아 밤바람을 쐬고 있었다. 소령이 대문을 닫으러 나오자 막리연이 입을 열었다.
"걸음이 좋다, 꼬마."
소령의 손이 문짝 위에서 멈췄다.
"무슨 뜻입니까."
"발을 놓는 순서가 보통 허드렛일꾼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 무게중심이 늘 앞꿈치에 있어. 걸어 다니면서도 언제든 몸을 틀 수 있게."
막리연은 술병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달빛 아래 그의 눈이 번뜩였다. 소령은 그 눈빛이 취한 사람의 것이 아님을 알아챘다. 술 냄새는 짙었지만 기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일부러 빈틈을 보이는 자의 여유였다.
"검 잡아본 적 있지?"
침묵이 처마 아래를 채웠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소령은 목소리를 눌렀다.
"없습니다."
"거짓말은 서투른 편이구나."
막리연이 천천히 일어섰다. 키가 소령보다 반 뼘은 컸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오자 소령의 다리가 반사적으로 반보 물러났다. 물러난 자신이 싫었지만 몸은 정직했다. 이 사내는 위험했다. 힘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사람을 몰아세우는 종류의 위험이었다. 게다가 기세를 억누른 채 상대의 빈틈만 살피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소령의 손이 무심결에 허리춤으로 향했다가 멈췄다. 그곳에는 검이 아니라 행주만 꽂혀 있었다.
싸울 수 없다.
아니, 싸워서는 안 된다.
여기서 정체가 드러나면 끝이었다. 취선객잔도, 팽노도, 담여화도 더는 평범한 자리에 머물 수 없게 된다. 소령은 이를 악물고 손을 내렸다. 도망치듯 피하는 대신, 끝까지 모르는 척 버티기로 했다.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막리연이 손을 들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마치 내일 날씨를 묻듯 태연한 어조였다.
"삼 년 전에 불탄 문파가 하나 있었어. 파서진에서 산 넷을 넘으면 나오는 골짜기."
소령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핏줄이 관자놀이를 때리는 것이 느껴졌다. 막리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억을 더듬는 시늉을 했다. 시늉이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아, 맞다."
막리연이 고개를 내리며 소령을 똑바로 보았다. 술기가 걷힌 눈이었다.
"청명문(靑冥門)."
세 글자가 밤공기를 갈랐다. 소령의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고, 등에 새겨진 검결이 화인처럼 뜨거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손이 저도 모르게 다시 허리춤으로 갔다. 검은 없었다. 그곳에는 행주만 꽂혀 있었다. 막리연은 그 손짓을 놓치지 않았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으나, 웃음이라 부르기에는 쓸쓸한 모양새였다.
"그 눈."
막리연이 낮게 말했다.
"숨기려면 눈부터 감췄어야 했어."
소령은 행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대문 너머로 팽노의 부엌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이 시각까지 불이 켜져 있다는 건, 팽노 역시 이 대화를 알고 있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가슴속에서는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 누가 감히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느냐는 분노였다. 그러나 그 뒤를 따라온 것은 뜻밖의 감정이었다. 삼 년 동안 누구도 부르지 않던 이름이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서늘한 안도. 소령은 그 감정이 더 두려웠다. 입을 열면 무언가 무너질 것 같아 끝내 침묵했다.
막리연도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빈 술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무 문이 닫히는 소리만 처마 밑에 남았다.
소령은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 행주 끝이 펄럭였다. 불타 버린 것은 문파만이 아니었다. 이름마저 잿더미 속에 묻혔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막리연은 어디서, 왜 그 이름을 꺼냈는가. 소령은 대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손끝이 떨렸다. 분노인지, 공포인지, 아니면 본래의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기이한 확인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가 등잔을 켜자 문 앞에 따뜻한 물 한 대야가 놓여 있었다. 팽노의 것이었다. 소령은 그 물에 손을 담갔다. 차갑게 굳어 있던 손마디가 조금씩 풀렸지만 머릿속은 더 어지러워졌다. 막리연은 청명문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팽노는 그런 사내를 아무렇지 않게 객잔에 들였다. 우연이라고 믿기에는 두 사람 모두 지나치게 태연했다. 등의 검결이 은근히 욱신거렸고, 밖에서는 막리연의 방에서 희미하게 술병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은 오지 않을 터였다. 소령은 문득, 팽노가 막리연을 처음 보는 척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처음 본 것인지 단 한 번도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마음에 걸렸다. 막리연이 청명문의 이름을 꺼내기 직전, 그의 눈에 스친 것은 탐욕도 위협도 아니었다. 소령이 분명히 읽은 그것은, 죄책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