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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10화]

숫자 사이의 빈자리

작성: 2026.03.13 14:41 조회수: 9
창작물 안내
[AI 생성물] 본 소설의 내용과 표지는 인공지능(AI) 모델을 통해 기획 및 작성된 허구의 창작물입니다.
이 콘텐츠는 보험을 소재로 한 창작물이며 실제 상품 추천이나 보장 판단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저녁 일곱 시 반, 민주는 식탁 위에 올려놓은 계산기 자판을 두 번 두드리고는 지웠다. 세 번째 눌렀을 때 나온 숫자가 두 번째와 같다는 걸 깨닫는 데 십 초가 걸렸다. 밥솥에서 뜸이 끝나는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견적서 세 장, 밀린 월세 고지서 한 장, 그리고 통장 잔액이 찍힌 종이 한 장이 반찬 접시가 올라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준수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본 건 식탁 위의 서류가 아니라, 엄마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민주의 돋보기안경은 세탁소 카운터 서랍 안에만 사는 물건이다. 그걸 집까지 가져왔다는 건, 숫자를 오래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준수는 신발을 벗다 말고 멈칫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밥 안 먹었어?"

"……응. 앉아."

민주의 대답이 짧았다. 그 짧음이 평소의 바쁨과 달랐다. 준수는 밥솥 뚜껑을 열고 주걱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밥을 푸는 대신 컵에 물을 따라 식탁 앞에 앉았다. 어머니의 계산기 옆에 물컵을 놓는 손이 아직 왼손 손등에 남은 화상 자국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

민주가 안경 너머로 아들을 올려다봤다. 준수의 왼손. 거무스름하게 아문 자리. 그 손으로 지금 물컵을 쥐고 있다.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민주는 견적서 맨 위 장을 준수 쪽으로 밀었다.

"세탁기 모터 교체, 건조기 배기구 수리, 내벽 곰팡이 제거. 합쳐서 사백이십. 거기다 명자 아줌마한테 밀린 월세 석 달치."

준수는 숫자를 훑었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얼굴이라는 걸 민주는 알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서로 모르는 척하는 게 이 집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장학금은 결과 언제 나와?"

"다음 주 금요일."

"……되면 좋겠다."

그 말이 끝나자 식탁 위에 짧은 침묵이 내렸다. 밥솥이 보온 모드로 넘어가며 찰칵 소리를 냈다. 민주가 계산기를 다시 두드렸다. 420 더하기 270. 690. 통장 잔액 114만 원. 빼기. 준수가 엄마의 손가락이 멈추는 걸 보았다.

"엄마, 이거."

준수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네 번 접은 자국이 선명한 통장 사본이었다. 민주는 받아 들고 펼쳤다. 아들 이름으로 된 계좌. 잔액 87만 원. 두 달간의 아르바이트비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한 번도 찾지 않은 돈.

"중단하라고 했잖아."

"돈은 그전에 들어온 거야. 쓴 적 없어."

민주의 손가락이 통장 사본 위에서 멈췄다. 87만 원. 아들이 뜨거운 커피를 손등에 쏟아가며 번 돈. '고맙다'고 말해야 할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둘 다 삼켜야 할지 몰라서 민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자기 앞에 놓인 또 다른 종이를 꺼냈다. 이번엔 민주 쪽이 숨기고 있던 것이었다.

적금 해지 확인서. 3년 만기까지 여덟 달 남았던 적금을 지난주에 깼다. 해지 환급금 230만 원. 준수는 그 숫자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이거 나 대학 보내려고 넣던 거 아니야?"

"……원래 용도가 그랬지."

"그걸 왜——"

"세탁소가 먼저야." 민주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 안경 너머의 눈은 아들 쪽을 보지 못했다. "가게가 돌아야 등록금도 내지."

준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자기도 모를 감정이 목 안쪽에서 뭉쳤다. 따질 수도 없었다. 따지면 엄마가 짊어진 무게에 돌을 하나 더 올리는 꼴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준수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계산기 줘 봐."

민주가 멍하니 건넸다. 준수가 숫자를 눌렀다. 114 더하기 87 더하기 230. 431만 원. 견적 420에 월세 270을 합치면 690. 431 빼기 690. 마이너스 259. 준수는 그 숫자를 식탁 한가운데에 돌려놓았다. 둘 다 그 빨간 마이너스를 나란히 내려다보았다.

"모자라."

"알아."

"근데 이제 둘이서 보니까," 준수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혼자 볼 때보다 좀 작아 보여. 숫자가."

민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본인도 구분하지 못할 표정이었다.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짧게 두 번, 명자 특유의 신호.

"민주야, 나 김치 좀 갖다줄라고——"

문 앞에 선 명자가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오다가, 식탁 위에 펼쳐진 견적서와 통장 사본과 계산기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3초 정도 시선이 서류 위를 훑더니, 김치 봉지를 싱크대 위에 툭 올려놓으며 말했다.

"……밥은 먹고 계산하자. 빈속에 마이너스 보면 위장이 먼저 뒤집어져."

준수가 픽 웃었다. 민주도 코끝을 훌쩍이며 안경을 벗었다. 명자가 밥솥 뚜껑을 열고 주걱을 집어 들었다. 세 사람이 밥을 푸고 김치를 꺼내고, 견적서 위에 숟가락 받침을 올려놓는 동안 아무도 숫자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침묵이 아까의 침묵과 달랐다. 아까는 서로 모르는 척하는 침묵이었고, 지금은 같은 걸 알고 나서 쉬어가는 침묵이었다.

밥을 반쯤 먹었을 때 명자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월세 건은 내가 좀 생각해볼 게 있어. 지금 말 안 할게, 어설프게 꺼내면 또 싸우니까." 민주가 고개를 들었지만 명자는 이미 김치를 집고 있었다. 민주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도 때로는 믿는 방식이라는 걸 이 몇 주 동안 배운 것인지, 아니면 그냥 밥이 목에 걸릴까 봐 참은 것인지 자기도 몰랐다.

식사가 끝나고 명자가 돌아간 뒤, 준수가 설거지를 하다 말고 물었다. "엄마, 명자 아줌마 보험 처리 진짜 되는 거야?" 민주는 행주로 식탁을 닦으며 대답했다. "모르지. 17년 전 하자가 면책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 보험이란 게 서류 넣는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니야." 준수는 그릇을 헹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짓이 어른스러워서, 민주는 아들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행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준수야."

"응."

"장학금 되면 좋겠다. 근데 안 돼도, 우리 어떻게든 하자."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만 두 번 울리고, 준수가 말했다. "어떻게든이 뭔데." 따지는 말투가 아니었다. 진짜 묻는 것이었다.

"아직 몰라. 근데 오늘 같이 계산기 두드린 게 '어떻게든'의 시작 아니겠어."

준수는 설거지를 끝내고 손을 닦으며 식탁 쪽을 돌아봤다. 견적서 위에 올려놓았던 숟가락 받침이 아직 거기 있었다. 마이너스 259만 원이 적힌 계산기 액정이 꺼져 있었다. 숫자는 사라졌지만 무게는 남아 있었다. 다만 이제 그 무게를 아는 사람이 한 명에서 둘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김치를 가져온 사람이 월세에 대해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어젯밤과 오늘 밤은 다른 밤이었다.

민주는 불을 끄기 전에 식탁 위의 서류를 한 데 모아 클리어파일에 넣었다. 견적서, 통장 사본, 적금 해지서. 각자 숨기고 있던 종이들이 한 파일 안에 나란히 들어갔다. 파일을 냉장고 옆 서랍에 넣고 문을 닫는 순간, 손가락 끝이 아주 잠깐 떨렸다. 하지만 돌아서는 발걸음은 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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