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를 다시 올린 건 수요일 아침이었다. 정확히 닷새 만이었다. 녹이 낀 셔터가 반쯤 올라간 채 끼이는 바람에 민주는 두 손으로 밀어 올려야 했고, 팔뚝에 힘을 줄 때마다 어깨 아래 근육이 쿡쿡 쑤셨다. 셔터가 끝까지 올라가자 새벽 햇살이 가게 안쪽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드라이클리닝 기계 위에 쌓인 먼지가 빛줄기 속에서 반짝였다. 민주는 그 먼지를 보며 한참 서 있었다. 닷새 동안 닫혀 있던 공간은 주인을 잊은 것처럼 냄새가 달라져 있었다. 세제 냄새 대신 축축한 콘크리트 냄새, 그리고 어디선가 올라오는 하수구 같은 기운. 민주는 환풍기를 틀고 앞치마를 매면서 중얼거렸다. "사람이 안 있으면 집도 금방 늙어."
전화를 건 건 오전 열 시였다. 보험사 고객센터 번호를 누르고, 안내 음성을 따라 1번, 3번, 다시 2번을 누르는 동안 민주는 카운터 위에 펼쳐놓은 서류를 한 번 더 들여다봤다. 계약자 이름 '박태식'. 사망 일자 옆에 연필로 희미하게 적힌 메모 — '수손 특약 확인할 것'. 그건 명자의 글씨도 아니었고 민주의 글씨도 아니었다. 누군가 이 서류를 이전에 들여다본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지만, 민주는 그 생각을 아직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다. 상담원이 연결되자마자 민주는 계약 번호를 불렀다.
"네,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민주는 손가락으로 카운터를 톡톡 두드리며 기다렸다. 이십 초쯤 지났을까. 상담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고객님, 혹시 이 계약 건으로 최근에 다른 분이 문의하신 적 있으신가요?" 민주의 손가락이 멈췄다. "다른 분이요?" "네, 약 열흘 전쯤 같은 계약 번호로 보상 청구 가능 여부를 물어보신 분이 계시는데요. 개인정보라 성함을 말씀드리긴 어렵고…" 민주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심장이 한 박자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이 보험에 대해서 물어봤다고요?" "네, 맞습니다. 혹시 가족 분이실 수도 있어서…" 민주는 상담원의 말이 끝나기 전에 고개를 저었다. 가족은 자기와 준수뿐이었고, 이 보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명자밖에 없었다.
점심 직전, 민주는 명자네 부동산 사무실 문을 열었다. 명자는 선풍기 앞에서 수박을 먹고 있었고,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언니, 에어컨 왜 안 틀어." "전기세가 사람을 잡아. 선풍기면 되지 뭘." 민주는 명자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수박 한 조각을 집었다. 달았다. 닷새 만에 먹는 과일이었다. 민주는 수박을 반쯤 먹다가 말했다. "언니, 그 보험 — 박태식 형부 이름으로 된 거. 나 말고 누가 또 보험사에 전화했어?" 명자의 수박 먹는 손이 잠깐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민주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명자는 수박씨를 뱉으며 대답했다. "내가 왜? 나는 안 했어. 그 서류 너한테 줬잖아." "그럼 누가 한 거야. 열흘 전이래." 명자는 손가락에 묻은 수박즙을 앞치마에 닦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열흘 전이면… 그때 나 속초 갔다 왔잖아. 동창회." 그건 사실이었다. 민주도 기억했다. 명자가 속초에서 사온 오징어가 아직 냉장고에 있었다.
"그럼 대체 누가?" 민주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명자는 수박을 내려놓고 민주를 똑바로 봤다. 그 눈이 평소의 수다스러운 빛과는 달랐다. "민주야, 태식이가 살아 있을 때… 이 건물 관리하면서 같이 다닌 사람이 있었어. 설비 쪽. 이름이 뭐였더라, 최 뭐시기." "설비?" "배관하고 전기 쪽 봐주던 사람. 태식이가 꼼꼼했으니까 그 사람한테 시공 기록 같은 거 다 맡겼거든. 근데 태식이 돌아가시고 나서 연락이 끊겼어." 민주는 수박을 든 채로 멍하니 명자를 봤다. 열흘 전 보험사에 전화한 사람. 그게 이 설비업자일 수도 있다는 건가. 아니면 전혀 다른 누군가인가. 민주의 머릿속에서 질문이 갈라져 나갔지만, 명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새 수박 조각을 잘라 민주 앞에 밀어놓았다.
오후 세 시, 세탁물 네 건을 처리하고 민주가 다리미질을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준수였다. "엄마, 나 오늘 좀 늦어." "왜?" "학교에서 조모임 있어서." 민주는 "응" 하고 끊으려다가 수화기 너머로 커피 머신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도서관에는 커피 머신이 없다. 민주는 그 소리를 듣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알았어. 밥은?" "사 먹을게." "많이 먹어." 전화를 끊고 민주는 다리미를 세웠다. 셔츠 위에 다리미 자국이 비뚤어져 있었다. 다시 눌러야 했다. 민주는 스팀을 뿌리며 혼잣말했다. "조모임이 커피 내리나."
준수의 왼손에 붕대가 감긴 걸 민주가 본 건 저녁 아홉 시였다. 준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신발을 벗으며 왼손을 주머니에 넣었지만, 재킷을 벗는 순간 소매 사이로 흰색 거즈가 삐져나왔다. 민주는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저으면서 그걸 봤다. 숟가락을 든 손이 굳었다. "손 왜 그래." 준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대답했다. "아, 이거? 학교에서 넘어졌어." "넘어져서 손에 붕대를 감아?" "긁혔거든." 민주는 찌개를 한 번 더 저은 뒤 불을 줄였다. 준수의 귀가 빨개지고 있었다. 지난번 앞치마 자국 때와 같은 빨간색. 민주는 알았다. 이건 넘어진 게 아니다.
식탁에 마주 앉았다. 밥, 된장찌개, 깍두기, 계란말이. 준수는 오른손으로만 숟가락을 들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민주는 준수가 밥을 반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말했다. "카페에서 데인 거지." 준수의 숟가락이 찌개 위에서 멈췄다. 국물이 숟가락 끝에서 한 방울 떨어졌다. 둘 사이에 이삼 초의 침묵이 흘렀다. 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가 어떻게." "아까 전화할 때 커피 머신 소리 들렸어." 준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민주도 내려놓았다. 식탁 위 반찬들이 둘 사이에 놓여 있었지만, 진짜 거리는 반찬 너머에 있었다.
"언제부터야." 민주의 목소리가 낮았다. 화난 게 아니었다. 화가 났으면 오히려 쉬웠을 것이다. 이건 화가 아니라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에 가까웠다. 준수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두 달… 됐어." "두 달." 민주는 그 단어를 반복했다. 두 달이면 누수가 시작되기 전부터였다. 세탁소가 닫히기 전부터. "왜 말 안 했어." "엄마가 힘든 거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왜 말 안 했냐고." 민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준수는 고개를 들었다. 엄마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준수도 알았다. 이건 혼나는 게 아니라 엄마가 아파하는 거라는 걸.
"손 봐." 민주가 손을 내밀었다. 준수는 망설이다가 왼손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민주가 조심스럽게 거즈를 들춰봤다. 손등에서 손목까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물집이 두 개 잡혀 있었고, 가장자리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커피가 아니라 스팀이었을 것이다. 민주는 세탁소에서 스팀 화상을 수십 번 입어봤기 때문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병원은?" "약국에서 연고 바르고 거즈 샀어." "이걸 연고로 때워?" 민주는 일어나서 구급함을 가져왔다. 화상 연고를 꺼내고 새 거즈를 준비하면서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동작은 정확했다. 준수는 엄마가 연고를 바르는 동안 고개를 돌렸다. 눈이 시큰거렸지만 울지 않았다. 대신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내일 병원 가." 민주의 말투는 명령이었다. 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주는 거즈를 감아주고 의료 테이프를 붙이면서 말했다. "아르바이트 당분간 쉬어." "엄마—" "쉬라고 했어." 준수는 입을 다물었다. 민주도 더 말하지 않았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쉬면 돈이 줄고, 돈이 줄면 이 식탁 위의 반찬이 하나씩 사라진다는 걸. 하지만 민주는 아들의 물집 잡힌 손등을 보면서, 반찬이 사라지는 게 아들의 손이 망가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목구멍을 턱 막았다.
설거지는 민주가 했다. 준수는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손에 접힌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엄마, 이거." 민주가 고무장갑을 낀 채로 돌아봤다. 준수가 내민 건 이번 달 카페 급여 명세서였다. 삼십이만 원. "다음 달 거까지 합치면 칠십 정도 돼. 세탁소 닫은 동안 밀린 거 메꿀 수 있어." 민주는 급여 명세서를 한참 들여다봤다. 숫자 옆에 '이준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활자가 아니라 손글씨였다. 소규모 카페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민주는 그 이름을 보면서,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쓰는 어른이 됐는지 생각했다.
"고마워." 민주가 말했다. 그 두 글자가 나오기까지 이를 악물어야 했다. 준수는 "응" 하고 짧게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민주는 고무장갑을 벗고 싱크대에 기댔다. 창밖으로 상가 골목의 가로등이 보였다. 명자네 부동산 간판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민주는 핸드폰을 꺼내 보험사 통화 기록을 다시 봤다. '다른 분이 먼저 문의하셨다'는 상담원의 말이 귓속에서 맴돌았다. 설비업자라는 사람. 최 뭐시기. 태식의 시공 기록을 갖고 있을 수도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왜 보험 계약을 들여다봤을까.
민주는 급여 명세서를 냉장고에 붙었다. 거기엔 이미 세탁소 거래처 전화번호, 준수의 수강 시간표, 그리고 누렇게 변한 가족사진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급여 명세서가 가족사진 옆에 나란히 놓였다. 민주는 그걸 보다가 혼잣말했다. "이 집은 냉장고 문짝이 가계부야."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한숨이 나왔고, 그 한숨 끝에 민주는 핸드폰을 들어 명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니, 그 설비업자 이름 기억나면 알려줘. 최 뭐시기라고 했지.' 답장은 삼 분 만에 왔다. '최용배. 근데 민주야, 그 사람 찾으면 나도 같이 만나자. 나도 물어볼 게 있어.' 민주는 그 문자를 읽고 화면을 껐다. 명자가 물어볼 게 있다는 건, 명자도 모르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이 건물에 대해 모르는 게 있는 건물주. 민주는 이상했지만, 오늘은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들의 화상 입은 손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불을 끄기 전, 민주는 준수의 방문 앞에 섰다. 문 아래 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노크는 하지 않았다. 대신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리고 돌아섰다. 복도 끝,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서 민주는 생각했다. 내일은 물어봐야 할 게 두 가지다. 아들에게는 정말 괜찮은지. 그리고 최용배라는 사람에게는 — 왜 남의 보험을 들여다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