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전, 사무실에는 탕비실 전기포트 끓는 소리보다 먼저 실적판이 눈에 들어왔다. 현우는 자켓을 걸면서 습관처럼 그쪽을 봤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지난주 마감 기준, 자기 이름 옆 숫자는 팀 내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딱 한 명이 아래 있다는 게 위안이 되기는커녕, 그 한 명이 입사한 지 두 달 된 막내라는 사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현우는 가방을 서랍에 밀어 넣으면서 모니터를 켰다. 화면이 켜지는 동안에도 시선은 자꾸 실적판 쪽으로 흘렀다.
"도 설계사, 이번 주도 화이팅."
팀장 최재원 씨가 지나가며 던진 한마디였다. 인사치레 같은 말이었는데 왜인지 현우는 뒷목이 살짝 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 주도'
라는 세 글자가 자꾸 걸렸다. 지난주도, 그 전 주도 별 성과가 없었다는 걸 팀장도 알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물론 팀장은 그냥 인사를 한 것이겠지만. 현우는 "네,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고,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동안 자신이 웃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 메일함을 열었다. 읽지 않은 메일이 열일곱 개였다. 훑어보니 대부분 사내 공지였고, 그 아래 박은주 씨 어머니 건 관련 보험사 답변 메일이 끼어 있었다. 제목만 보이고 내용은 아직 펼치지 않았다. 현우는 그 메일 위에 커서를 올려놓은 채 클릭하지 않았다. 결과가 좋으면 다행이고, 나쁘면 어떻게 전달할지 말이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였다. 잠깐만, 조금만 더 있다가. 그는 커서를 다른 메일로 옮겼다.
오전 열 시쯤, 사무실에 본격적인 소음이 생겼다. 선배 설계사 박준수 씨가 냉장고에서 커피 캔을 꺼내 들고 실적판 앞에 서서 혼자 중얼거렸다.
"야, 이 달도 나 1등이면 팀 회식 쏘는 거 맞지?"
옆 자리 이선미 씨가 피식 웃으며 받았다.
"준수 씨가 쏘면 또 삼겹살집이잖아요. 저는 사양할게요."
"아니, 이번엔 다르다고. 정식집 갈 수도 있어. 근데 2등 이하는 서비스 없음."
웃음소리가 잠깐 번졌다. 현우는 모니터를 보는 척하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에 합류하려고 했는데, 정작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색하게 굳은 표정을 들킬까 봐 얼른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잔은 비어 있었다. 그는 빈 잔을 든 채 잠깐 그대로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박준수 씨가 실적판을 다시 훑더니 느닷없이 말했다.
"도 설계사는 요즘 뭐 준비 중이야? 상담은 계속 나가는 것 같던데."
현우는 잠깐 멈췄다. 악의가 없는 질문이라는 건 알았다. 그냥 선배가 후배한테 던지는 가벼운 관심이었다. 그런데 그 가벼움이 정확히 가장 쓰린 곳에 닿았다.
"아, 네. 진행 중인 건 있어요."
"오, 이번 주 안에 되는 거야?"
"그건... 좀 더 봐야 할 것 같아요."
박준수 씨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게 다였다. 대화는 30초도 안 됐다. 그런데 현우는 한동안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진행 중인 건 있다고 했지만, 박은주 씨 건은 아직 어머니 병력 확인 결과를 열어보지도 않은 상태였고, 다른 신규 건은 지난주 연락이 끊겼다. 이번 주 안에 된다는 건 솔직히 모르는 일이었다. 모른다고 말할 수 없어서 안다는 뉘앙스로 얼버무린 것이었다. 펜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놨다. 메모할 것도 없었다.
점심시간 직전, 현우는 탕비실에 들어가 전기포트에 물을 채웠다. 혼자 있을 생각이었는데, 아라가 머그컵을 들고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현우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탕비실 안에는 전날 누군가 끓여 놓은 커피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진하지 않고 식은 냄새였다. 아라는 아무 말 없이 머그컵에 티백을 꺼내 걸었고, 현우는 포트를 붙들고 서서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밥 안 나가요?"
아라가 먼저 물었다.
"조금 이따 나가려고요."
"표정이 왜 그래요."
현우는 순간 대답을 고르려다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아까 준수 선배가 이번 주 안에 되냐고 물어봤는데, 그냥 얼버무렸어요."
아라는 티백 끈을 손가락에 한 번 감았다 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응이 없자 현우는 덧붙였다.
"그게 왜 이렇게 찝찝한지 모르겠어요. 그냥 흘려들으면 되는 건데."
포트에서 끓기 시작하는 소리가 났다. 아라가 그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웃어 넘기지 못하는 게 찝찝한 거예요, 아니면 얼버무린 게 찝찝한 거예요."
현우는 잠깐 생각했다. 두 가지가 섞여 있었는데, 정확히 짚어보니 후자였다.
"얼버무린 거요."
"그럼 그게 맞는 거네요. 찝찝하게."
아라는 덤덤하게 말했다. 위로도 아니고 꾸짖는 것도 아닌, 그냥 사실 확인 같은 말이었다. 현우는 어이없게도 그 말에서 조금 힘이 빠졌다. 나쁜 쪽으로가 아니라, 버티고 있던 어깨 쪽으로. 아라는 머그컵을 들고 탕비실을 나갔고, 현우는 포트 앞에 서서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끓는 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오후에 현우는 책상에 앉아 다음 주 상담 일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아까 열지 않은 메일을 다시 불러왔다. 박은주 씨 어머니 건 보험사 회신이었다. 클릭하기 전에 잠깐 숨을 골랐다. 화면을 펼쳤다. 결과는 예상보다 복잡했다. 당뇨 외에 혈압약 복용 이력이 추가 심사 사유로 잡혔고, 보험료 조정 가능성이 언급돼 있었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현우는 메모지 한 귀퉁이에 '결과 나오면 먼저 듣기'라고 썼다가 지웠다. 당연한 말을 써 놓는 것도 우습고, 안 써 놓으면 잊을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다시 썼다. 이번엔 지우지 않았다.
퇴근 한 시간 전, 현우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보는 순간 손가락이 멈췄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그런데 앞자리 세 자리가 지난번에 봤던 그 번호와 같았다. 7화 말미에 진동했던, 낯설지 않았던 그 번호. 현우는 진동이 끊길 때까지 화면을 바라봤다. 받지 않았다. 받지 못한 건지, 받지 않은 건지, 그 차이를 자신도 잘 몰랐다. 전화가 끊기고 나서 부재중 표시가 생겼다. 그 아래 문자 알림이 하나 떴다. 미리보기에는 이름 없이 번호만 있었고, 첫 문장만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 김정…'
현우는 화면을 잠갔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 누군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고,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고, 실적판 위 형광등이 평소보다 조금 더 밝게 켜져 있었다. 다 별것 아닌 소리들이었는데, 오늘따라 전부 크게 들렸다. 현우는 잠긴 화면을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뒤집어 놓으면 덜 신경 쓰일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퇴근길, 현우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재중 화면을 다시 꺼냈다. 김정이라는 두 글자 뒤에 붙은, 마침표처럼 잘린 문장이 계속 눈에 밟혔다.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손가락을 내렸다. 박은주 씨 건 결과도 아직 어떻게 전달할지 정리가 안 됐고, 오늘 얼버무렸던 것도 아직 소화가 안 됐고, 지금 이 문자에 뭐라고 써야 할지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3화 때처럼 메모장을 열고 싶지 않았다. 열었다가 또 스물네 번 고칠 것 같아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현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뗐다. 오늘 하루 중 가장 빠른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