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선객잔의 부엌은 새벽이 가까워져서야 겨우 숨을 골랐다.
화덕 안 장작은 거의 다 타서 붉은 속만 남았고, 국솥에서는 식은 기름 냄새가 천천히 올라왔다. 젖은 행주와 재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한소령은 나무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손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채였다. 손가락 마디마다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현성 골목의 흙이었다.
씻으면 떨어질 텐데, 그는 아직 그러지 못했다.
문이 덜컥 열렸다.
막리연이 들어왔다. 오늘은 술 냄새가 없었다. 대신 신발 밑창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어딘가를 다녀온 얼굴이었다.
그는 소령 맞은편 나무 상자에 걸터앉더니,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소령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봐라."
소령은 말없이 종이를 받았다.
오방맹 인장이 찍혀 있었다. 공문 형식이기는 했지만 정식 문서는 아니었다. 급히 베껴 쓴 초안 같았다. 획은 거칠었고, 먹이 번진 자리도 많았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혈사문의 이동 경로, 그들이 거쳐 간 마을 이름, 날짜. 그리고 맨 아래, 다른 글자보다 더 눌러 쓴 세 글자.
설리항.
소령의 눈이 그 이름 위에서 멎었다.
"이걸 왜 이제 보여 줍니까."
목소리는 낮았지만, 눌린 쇳소리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막리연은 팔꿈치를 무릎에 얹고 손을 맞잡았다.
"어젯밤 네 얼굴을 봤다."
"그래서요."
"윤채 앞에서 칼을 뽑지 않았지."
소령의 손끝이 종이 끝을 구겼다.
막리연이 말을 이었다.
"그때 뽑았으면, 넌 지금 이 종이보다 네 분노를 먼저 믿었을 거다. 그런 놈한테는 뭘 보여 줘도 소용없어."
"그럼 시험한 겁니까."
"아니. 기다린 거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게 더 사람을 거슬리게 했다.
소령은 종이를 접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화가 난 건 분명했다. 그런데 그 화가 막리연에게만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불쾌했다. 윤채 앞에서 칼을 뽑지 않은 것이 절제였는지, 겁이었는지, 아직 자기 자신에게도 답하지 못했으니까.
부엌 밖에서 바람이 문짝을 한 번 쳤다.
탁.
막리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초안을 올린 놈이 있다. 오방맹 하급 관리였지. 보고는 묵살됐고, 그 뒤로 자리에서 밀려났다. 다들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가 소령을 똑바로 봤다.
"살아 있다. 관아 북쪽 창고에 묶여 있어."
소령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확실합니까."
"어제 확인했다."
"왜 그 사람을 안 꺼냈죠?"
막리연이 피식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을 짧게 뱉은 것에 가까웠다.
"꺼내는 건 어렵지 않아. 꺼낸 뒤가 어렵지. 그 입이 열리는 순간, 설리항 쪽도 움직일 테니까."
부엌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소령은 종이를 다시 펼쳐 보았다. 먹 번진 글씨가 꼭 누군가 피를 닦다 만 자국처럼 보였다.
이름 하나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나.
그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객잔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돌아갔다.
팽노는 솥뚜껑을 열고 국을 끓였고, 담여화는 약재 바구니를 들고 들어와 부뚜막 한쪽을 차지했다. 소령은 그릇을 나르고 상을 닦았다. 손님들은 떠들었고,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담여화가 빈 그릇을 받으려다 소령의 손목을 잠깐 잡았다. 약재 냄새가 밴 손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손가락 마디의 딱지와 긁힌 자국을 훑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삽주 뿌리 남았어?"
소령이 먼저 물었다.
담여화가 눈썹을 까딱했다.
"그릇부터 내려놔. 손에 힘 풀렸잖아."
핀잔처럼 들렸지만,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소령은 대꾸 대신 그릇을 내려놓았다. 담여화는 더 묻지 않았다. 모른 척해 주는 것도 때로는 손을 내미는 방식이라는 걸, 그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점심 장사가 끝난 뒤였다.
마당에서 장작을 패던 소령은 도끼를 내리치다 말고 멈췄다. 처마 밑 평상에 앉은 팽노가 담배에 불을 붙여 놓고도 한 모금 빨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도현진이 나한테 사람 하나를 맡겼다."
소령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청명문이 뒤집히면 마지막 아이를 이리 보낸다고 했지. 받아 두라고 하더군."
도끼날이 장작에 박힌 채 멎었다.
소령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사부가 이곳을 알고 있었다는 것.
자신이 여기까지 흘러온 길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
그 사실은 위로보다 먼저 서늘함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오래전부터 자기 몫의 길을 정해 두고 있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알았다."
"그런데 왜 말 안 했습니까."
팽노는 담배를 내려놓았다. 굵은 손가락 마디가 잠깐 떨렸다가 멎었다.
"네가 먼저 버텨야 했으니까."
"말 안 하는 게 버티는 겁니까."
이번에는 소령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팽노가 그를 올려다봤다. 늙은 눈이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아니다. 다만 남의 이름으로 서는 버팀목은 오래 못 간다. 네 발로 서는 걸 먼저 보려 했다."
소령은 도끼 자루를 놓고 평상 끝에 앉았다. 마당에는 쪼개진 장작 냄새와 흙먼지가 떠 있었다. 둘 사이에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소령이었다.
"설리항이라는 이름, 아십니까."
팽노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 짧은 흔들림이 대답보다 먼저 많은 것을 말했다.
"안다."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한마디는 무거웠다. 소문으로 들어 아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래전에 칼끝으로 새겨 둔 이름을 다시 입에 올리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소령은 노인의 옆얼굴을 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사부님과도 관계가 있습니까."
팽노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마른 입술을 한 번 문질렀다.
"지금은 거기까지다."
소령의 턱이 굳었다.
또 침묵이었다.
또,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화가 식었다. 대신 다른 것이 올라왔다. 차갑고 단단한 것. 남이 정해 준 때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끝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해 질 무렵, 막리연은 평상에 다리를 뻗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령은 그 앞으로 가서 종이를 내밀었다.
막리연이 고개를 들었다.
"결정했나."
"내일 관아 북쪽으로 갑니다."
"같이 가자는 말이냐, 허락해 달라는 말이냐."
소령이 종이를 막리연 가슴 쪽으로 밀어 넣었다.
"통보입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막리연이 낮게 웃었다.
"이제야 좀 사람 같군."
소령은 웃지 않았다.
"대신 하나는 분명히 합시다."
"뭐지?"
"이번엔 아는 걸 숨기지 마십시오. 저도 묻지 않고 넘기지 않겠습니다."
막리연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장난기 비슷한 것이 걷히고, 오래 묵은 피로가 잠깐 드러났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좋다. 대신 너도 하나 약속해라."
"말해 보시죠."
"내일 칼을 뽑아야 할 때가 오면, 이번처럼 망설인 걸 부끄러워하지 마라. 망설인 놈만이 제대로 고른다."
소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위로처럼 들려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은 뒤, 소령은 부엌 뒤 우물가에 섰다.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어 올리고, 손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손가락 마디를 감쌌다. 말라붙은 흙이 천천히 풀려 나갔다. 물 위로 검붉은 먼지가 번졌다가 흩어졌다.
그는 손을 씻으며 생각했다.
윤채의 경고.
종이 위의 설리항.
관아 창고에 묶인 하급 관리.
그리고 설리항의 이름 앞에서 눈을 내리깔던 팽노.
조각은 늘어났는데, 그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일 창고로 가면, 누군가는 더는 숨길 수 없게 된다.
소령은 물에서 손을 꺼냈다. 손등에 맺힌 물방울이 달빛을 받아 희게 떨렸다.
등 뒤가 가늘게 욱신거렸다. 등에 새겨진 검결이 떠오르자, 그는 무의식중에 어깨를 폈다.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알았다.
칼을 뽑지 않는 것만이 버티는 일은 아니었다.
묻어 둔 이름을 끝내 끌어내는 것도, 싸움이었다.
우물가를 돌아서기 직전, 객잔 담장 너머에서 아주 짧은 소리가 났다.
사각.
낙엽 밟는 소리 같았다.
소령의 시선이 곧장 어둠으로 향했다. 손은 저도 모르게 허리의 단도 쪽으로 갔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칼자루를 감쥐었다.
어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먼저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은,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