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아홉 시 오십 분, 이겸은 14층 복도 끝에 서 있었다. 합동 실무회의 시작까지 십 분이 남아 있었다. 복도에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계열사 실무자들이 명함을 교환하며 웃었고, 전략실 쪽 사람들은 그 옆에서 아무것도 교환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 대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겸은 생수 자판기 앞으로 걸어가 종이컵에 물을 받았다. 마실 생각은 없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주변을 훑을 수 있다. 예전 생에서 익힌 습관이었다. 회의 전 복도는 정보가 가장 날것으로 돌아다니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자리에 앉기 전에 이미 줄을 선다.
"부장님, 자리 배정표 받으셨어요?"
해진이 회의실 입구에서 A4 한 장을 들고 다가왔다. 이겸은 잠자코 그것을 받아 들었다. 테이블 배치도였다. 직함 옆에 이름이 박혀 있었고, 자리는 가나다순이 아니었다. 이겸은 두 번 읽었다.
"전략실 이 자리."
이겸이 손가락으로 한 칸을 짚었다.
"CFO보다 위야."
해진이 배정표를 들여다봤다.
"계열사 CFO가 오면 보통 상석 아닌가요?"
"보통은."
이겸은 종이컵을 자판기 위에 올려놓았다.
"근데 오늘은 아니야."
회의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안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겸은 서두르지 않았다. 늦게 들어가는 사람은 이미 앉은 자리를 볼 수 있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자기 자리를 찾느라 주변을 못 본다. 이겸은 복도에서 삼십 초를 더 버텼다. 그 사이 전략실 실무자가 들어갔고, 계열사 CFO가 그 뒤를 따랐다. 순서가 배정표와 정확히 일치했다. 우연이 아니었다.
회의실 안은 열두 명이 앉기에 딱 맞는 크기였다. 긴 타원형 테이블, 창가 쪽으로 햇빛이 얇게 들어오고 있었고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져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낮게 흘렀다. 이겸은 문 가까운 쪽 끄트머리 자리에 앉았다. 회의록 작성자 자리였다. 발언권은 없지만 모두를 볼 수 있는 자리. 이겸은 노트북을 열고 회의록 양식을 띄웠다. 화면 밝기를 한 칸 낮췄다.
장승민이 들어온 건 이겸이 착석하고 삼 분이 지나서였다. 그는 차준석 바로 옆이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 중간쯤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은 사람처럼. 이겸은 그 자리를 한 번 봤다. 예전 생에서 장승민은 이런 자리에서 항상 준석 옆에 앉았다. 가까이 있어야 통제할 수 있으니까. 오늘은 달랐다. 거리를 둔다는 건 이미 다른 채널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이겸은 그것을 적지 않았다. 기억해두는 것으로 충분했다.
강인호가 들어왔다. 이겸은 시선을 회의록 양식으로 내렸다. 강인호는 계열사 실무자 옆자리에 앉았다. 내부감사팀 팀장이 계열사 실무 라인 바로 옆에. 이겸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인지 아닌지를 이 자리에서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판단은 회의가 끝난 다음에 해야 한다. 강인호는 자리에 앉으면서 이겸 쪽을 보지 않았다. 그것도 기억해뒀다.
회의는 오전 열 시 십오 분에 시작됐다. 의장은 전략실 부장이었다. 안건은 계열사 간 내부 거래 기준 재정비였다. 이겸은 처음 이십 분 동안 안건 내용을 거의 듣지 않았다. 대신 누가 누구를 보고, 누가 먼저 발언하고, 누가 발언하지 않는지를 봤다. 계열사 CFO는 세 번의 발언 기회에서 두 번을 넘겼다. 넘길 때마다 전략실 실무자 쪽을 한 번씩 봤다. 그 시선이 허락을 구하는 것인지 아닌지, 이겸은 멈추지 않고 받아 적었다. 발언 내용이 아니라 발언을 넘기는 타이밍을.
변곡점은 오전 열 시 사십 분쯤이었다. 전략실 실무자가 계열사 간 대금 지급 기준 개선안을 꺼내면서 "기존 분류 코드 체계를 유지하되 일부 예외 항목을 별도 관리하자"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이겸의 손이 잠깐 멈췄다. 별도 관리. 예외 항목. C07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움직였다. 말하지 않았다. 적지 않았다. 그냥 멈췄다가 다시 썼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한 박자 늦게 내려앉았다.
강인호가 그 시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발언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건 발언록에 남지 않는다. 이겸은 그것을 봤다. 강인호는 계열사 실무자 오른쪽에 앉아 있었고, 전략실 실무자 발언 이후 처음으로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 기울기가 이겸의 등을 타고 올라왔다. 에어컨 바람이 여전히 낮게 흘렀고, 회의실 안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 각도를 보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건 열한 시 오십 분이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이겸은 회의록을 닫고 일어섰다. 해진이 입구 쪽에서 이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떠셨어요?"
해진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겸은 복도로 나서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CFO가 세 번 중 두 번 넘겼어. 전략실 실무자 보면서."
"그건 그냥 눈치 보는 거 아닌가요?"
"눈치는 윗사람한테 봐. 그 실무자가 CFO보다 위에 있다는 얘기야. 직함 말고."
이겸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조직도엔 없어."
해진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둘이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면서 복도 소음이 잘렸다.
"강인호 팀장님도 거기 계셨잖아요."
이겸은 층수 버튼을 눌렀다.
"응."
"혹시 원래 저 회의에 팀장님이 들어가는 게 맞는 건가요? 내부감사팀이 합동 실무회의에 배석하는 게 보통 있는 일이에요?"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동안 이겸의 머릿속은 자리 배치도를 다시 펼치고 있었다. 강인호의 자리. 계열사 실무자 옆. 전략실 실무자의 발언 타이밍. 고개를 끄덕인 각도. 그것들이 한 줄로 연결되는지 아직은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회의에서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비리의 몸통은 직함 순서 안에 없다. 그것은 직함들 사이에서, 발언과 침묵 사이에서, 자리와 자리 사이의 거리로 작동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이겸은 책상에 앉아 회의록 초안을 열었다. 민가온에게 메시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C07 코드 세 차례 반복 기록, 그리고 오늘 회의에서 나온 '별도 관리 예외 항목' 발언. 둘이 같은 구조를 가리키고 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이겸은 멈췄다. 민가온이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한 사실이 전략실 감지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걸 이겸은 알고 있었다. 확인하고 싶은 것과 확인하는 방식 사이에는 언제나 값이 있다. 오늘 치러야 할 값이 어디까지인지, 이겸은 아직 계산을 끝내지 못했다. 커서가 입력창 위에서 깜빡이다 멈췄다.
오후 두 시, 해진이 책상 옆에 잠깐 섰다.
"부장님, 아까 회의에서 배정표 받으셨잖아요. 그거 원본이에요. 제가 복사해뒀을게요."
이겸이 고개를 들었다. 해진은 이미 복사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겸은 그 뒷모습을 잠깐 봤다. 해진은 이겸이 왜 자리 배치도를 챙기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챙겼다. 쓸 것 같으니까. 그 직감이 때로는 이겸의 계산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이겸은 그게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 해진이 이 안으로 깊이 들어올수록 다음 값은 이겸 혼자 치를 수 없게 된다. 복사기 소리가 낮게 울렸다. 이겸은 다시 화면을 봤다. 커서는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