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아홉 시 십이 분, 이겸은 서면 요청서를 출력했다.
프린터 열기가 손등에 닿았다. A4 두 장이 트레이에 내려앉는 소리는 짧고 건조했다. 이겸은 종이를 들어 내용을 한 번 더 읽었다. 수신처는 감사위원회 직통. 발신인은 내부감사팀 부장 한이겸. 첨부 항목은 TJ-0394 접근 기록 요약과 보고서 제출 경로 변경 요청. 열다섯 줄짜리 문서였다. 예전 생에서 이 문서는 전략실 앞에서 사흘 동안 묶였다. 이번에는 그 경로를 처음부터 끊었다.
해진이 복사기 옆에서 스테이플러를 찾는 척 서 있었다. 이겸은 출력물을 봉투에 넣으며 낮게 말했다.
"오늘 오전 중에 내가 직접 위원장 비서실에 넣는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해진이 스테이플러를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맞긴 한데요."
짧은 침묵이 있었다. "그러니까 더 무섭습니다." 이겸은 봉투 접착면을 눌렀다. 해진이 무서운 이유를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먼저 쓰인다는 걸 해진은 아직 배운 적이 없었다. 이겸은 그 사실을 오늘도 말하지 않았다.
봉투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강인호 팀장의 방 유리 너머가 눈에 걸렸다. 강인호는 전화 중이었다. 화면이 아니라 책상 위 수화기였다. 유선 전화. 사무실 안에서 유선 전화를 쓰는 사람은 강인호뿐이었다. 이겸은 그 장면을 이 초 동안 봤다가 시선을 옮겼다. 유선 전화의 상대는 기록이 남지 않는 내선 번호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걸려온 수신이었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았다. 강인호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창문 쪽을 봤다. 이겸과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마주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겸의 등 쪽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열 시 정각에 강인호가 방 밖으로 나왔다.
"오늘 오전 열 시 삼십 분, 팀 전체 회의. 외부 출장 중인 사람도 화상으로 참여."
강인호는 팀 전체를 훑으며 말했다. 목소리에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그게 더 나쁜 신호였다.
"회의 안건은 이따 공유할게요."
이겸의 손이 봉투 위에서 멈췄다. 서른 분. 서면 요청서를 비서실에 넣으려면 지금 나가야 했다. 회의 소집이 그걸 막으려는 타이밍인지, 우연한 일정인지, 이겸은 삼 초 안에 판단해야 했다. 강인호가 유선 전화를 끊은 시각과 회의 소집 사이의 간격은 오 분이 채 되지 않았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간격이 너무 좁았다.
이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강인호가 이겸을 봤다. 표정은 없었다.
"그래요."
딱 한 마디였다. 허락인지 확인인지 알 수 없는 온도였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겸은 잠깐 멈췄다. 감사위원회 비서실은 이 건물 십사층이었다. 올라갔다 오면 이십오 분. 회의 시작 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겸은 봉투를 겨드랑이 안쪽에 끼우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문 안에서 이겸은 숨을 고르게 쉬었다. 결단은 이미 어제 밤에 끝났다. 지금은 그 결단을 몸으로 실행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십사층 비서실 앞 데스크에는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직원이 앉아 있었다. 이겸이 봉투를 내밀었다.
"내부감사팀 한이겸 부장입니다. 위원장 직통 수신 건입니다."
직원이 봉투를 받아 수신 확인 도장을 찍었다. 종이 위에 시각이 박혔다. 오전 열 시 십일 분. 이겸은 그 도장 소리를 들으며 숨을 한 번 고르게 쉬었다. 예전 생에서 이 봉투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장 잉크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낡은 사무용품 특유의 냄새였다. 이겸은 그 냄새를 오래 기억하기로 했다.
열 시 이십팔 분에 이겸이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해진과 민가온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민가온은 노트북을 열어 두었고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해진은 파우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겸이 민가온 옆에 앉으면서 눈빛으로 물었다. 민가온은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른다는 뜻이었다. 회의실 창문 너머로 아침 햇빛이 테이블 모서리를 비추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빛이었다.
강인호가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노트를 들고 있었다. 잠금쇠가 달린 것이 아니라 일반 링 노트였다. 이겸은 그 노트를 봤다. 예전 생에 없던 잠긴 노트와는 달랐다. 강인호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않고 옆에 끼운 채 앉았다.
"간단하게 합니다."
강인호가 말을 시작했다.
"어제부로 전략실에서 감사팀 보고서 제출 일정 확인 요청이 왔습니다. 공식 루트는 아니고 실무 선에서요. 팀 안에서 누가 전략실 쪽과 별도 접촉이 있었는지 제가 확인해야 합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해진이 파우치 위에 손을 얹었다. 이겸은 그 손이 살짝 단단해지는 걸 봤다. 민가온은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 아무것도 치지 않았다.
"별도 접촉이라면 어떤 범위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이겸이 천천히 물었다. 강인호가 이겸을 봤다.
"보고서 제출 경로나 일정에 관해 팀 외부와 먼저 조율한 사람이 있으면 말해달라는 겁니다."
이겸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저는 없습니다."
한 박자 뒤에 덧붙였다.
"오늘 오전에 감사위원회 직통으로 서면 요청서를 넣었습니다. 팀 내부 보고서 수신처 관련 건입니다. 팀장님께 먼저 보고했어야 하는데, 순서가 뒤집혔습니다."
강인호의 시선이 멈췄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얇아지는 것 같았다. 민가온이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봤다. 해진은 파우치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감사위원회 직통이요." 강인호가 다시 말했다. 확인인지 질문인지 알 수 없는 온도였다. "네." 이겸은 강인호의 눈을 봤다. "오전 열 시 십일 분에 수신 확인 도장 받았습니다."
강인호가 링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 무언가 적혀 있었지만 이겸의 자리에서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강인호는 그것을 읽지 않고 다시 덮었다. 잠깐이었다. 그 잠깐 동안 강인호의 손가락이 페이지 위에 머물렀다가 떠났다. 결정을 미룬 것인지, 이미 결정이 끝난 것인지 이겸은 알 수 없었다.
"회의는 여기까지 합니다."
강인호가 말했다.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민가온이 이겸 쪽으로 기울었다.
"전략실이 어젯밤에 제 이름으로 내부 메모 하나 돌렸어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제 보고서 지연 건이요. 제 이름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겸은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민가온의 이름이 전략실 내부 메모에 올랐다는 것은 경로 전환이 이미 감지됐다는 뜻이었다. 예상한 순서보다 열두 시간이 빨랐다. 민가온은 이겸의 표정을 읽으려는 듯 잠깐 기다렸다. 이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해진이 파우치 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이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어제 출력해 뒀던 거요."
로그 출력본이었다.
"팀장님이 회의 소집하기 전에 이미 이거 보셨을 것 같아서요."
이겸은 그 종이를 받았다. 해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강인호가 출력본을 봤을 가능성을.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이겸에게 먼저 건넸다. 이겸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면서 해진을 봤다. 말이 없었다. 고맙다는 말도, 잘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해진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먼저 문 쪽으로 걸어갔다. 파우치가 어깨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작고 단단한 소리였다.
복도에서 이겸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 강인호의 잠긴 노트는 오늘 회의실에 없었다. 링 노트가 있었다. 잠긴 노트와 링 노트. 이겸이 예전 생에서 본 적 없는 것은 잠긴 것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이겸은 아직 모른다. 서면 요청서는 감사위원회에 닿았다. 민가온의 이름은 전략실 메모에 올랐다. 해진의 로그 출력본은 이겸의 주머니 안에 있다. 시즌 1의 판은 여기서 닫힌다. 그러나 강인호가 잠긴 노트를 열지 않은 이유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