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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10화]

첫 결산, 아직 끝나지 않은 이름

작성: 2026.04.20 11:48 조회수: 76
창작물 안내
[AI 생성물] 본 소설의 내용과 표지는 인공지능(AI) 모델을 통해 기획 및 작성된 허구의 창작물입니다.
이 콘텐츠는 AI가 창작한 장기 연재소설입니다. 실제 인물이나 사건과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오후 네 시 십칠 분, 내부감사팀 사무실의 프린터는 조용했다. 오전 내내 이유 없이 열을 내더니 이제는 아무것도 출력하지 않은 채 식어 있었다. 이겸은 그 침묵이 낯설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예전 생에서 배웠다.

창밖으로 빌딩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이겸은 커피잔을 책상 끝으로 밀어 두고 모니터 화면을 껐다. 빈 화면이 검게 반사됐다. 그 안에 자기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예전 생에서 이 사무실을 나간 건 저녁 일곱 시가 넘어서였다. 박스 하나에 짐을 담고, 아무도 잡지 않았다. 지금은 달랐다. 아직 강인호가 돌아오지 않았고, 그 공백이 이겸에게 남아 있었다.

해진이 책상 끝에 A4 두 장을 내려놓았다. 위에는 카드키 출입 로그, 아래는 공용 계정 접근 이력이었다. 두 장 모두 강인호 팀장의 이름이 연결된 시간대에 공백이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가 약간 구겨져 있었다. 프린터가 뜨거울 때 뽑은 흔적이었다.

"오전 아홉 시 사 분부터 오후 두 시 삼십 분까지요. 빌딩 어디에도 카드키 기록이 없어요."

해진이 손가락으로 시간 열을 짚었다.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끝이 약간 조였다.

"그리고 박재현 씨 계정 마지막 접근 시각이 오전 열 시 오십육 분이에요. 퇴사 처리 완료 후 열한 달이 지난 시점이고요."

이겸은 두 장을 나란히 펴 놓고 한 번씩 읽었다. 빠르게 읽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숫자 하나하나를 암기하듯 봤다. 예전 생에서 이 자료를 처음 봤을 때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시점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아직 강인호가 돌아오지 않았다.

"VPN 승인 로그는?"

"없어요. 외부 접속인데 승인 기록이 없다는 건 누군가 관리자 권한으로 직접 세션을 열었거나, 퇴사 처리 이후에도 계정을 살려 둔 거예요."

해진이 말하다 멈췄다.

"박재현 씨 퇴사 결재자가 팀장님이잖아요."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진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대답이 필요한 게 아니라 확인이 필요한 거였다. 이겸은 그 차이를 안다.

"로그 출력본은 네 것만 갖고 있어. 내 것은 따로 뽑지 마."

이겸이 천천히 말했다.

"팀장이 돌아오면 이 종이들 안 보이는 데 있어야 해."

해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술을 한 번 눌렀다. 무언가 더 물으려다 참는 얼굴이었다. 이겸은 그 얼굴도 기억했다. 예전 생에서도 해진은 그 표정을 지을 때 결국 말하는 쪽을 골랐다.

"박재현이라는 사람, 부장님은 알아요?"

잠깐의 정지가 있었다. 이겸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컵 바닥에 가까운 커피였다. 쓰고 차가웠다.

"이름은 들었어."

이겸이 말했다.

"얼굴은 기억 안 나."

거짓말이었다. 박재현의 얼굴은 기억났다. 예전 생에서 같은 층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눈을 잘 맞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조용하고 단정했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방식으로 오래 살아남은 타입이었다. 그게 위장이었는지 아닌지, 이겸은 그때 알아챌 기회를 놓쳤다. 그 기회를 놓친 대가가 얼마였는지도 알고 있었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종류의 값이었다.

해진이 로그 출력본을 반으로 접어 자기 서랍 안에 넣었다. 서랍 잠금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작게 났다. 이겸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해진이 이 판에 발을 들인 순간을 확인했다. 자발적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게 해진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이겸은 아직 판단을 미뤘다.

오후 다섯 시가 되기 직전, 민가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짧았다.

'오늘 하루 더 기다릴게요. 내일 오전까지예요.'

이겸은 그 문장을 두 번 읽고 화면을 껐다. 하루를 더 번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하루가 무게가 있었다. 민가온이 자발적으로 멈춘 게 아니라 이겸의 요청으로 멈춘 것이었고, 내일 오전은 반드시 이겸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 데드라인이 되었다. 번 게 아니라 빌린 것이었다. 이자가 붙는 종류의 시간.

그리고 강인호가 돌아온 건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이었다.

문이 열렸을 때 이겸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겸은 빈 화면을 띄워 두고 있었다. 강인호가 들어오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사무실에 퍼지는 특유의 냄새, 바람을 맞고 들어온 사람의 냄새였다. 코트 안쪽에서 바깥 공기가 빠져나오는 냄새. 이겸은 고개를 들었다.

"늦었네요, 팀장님."

"응, 외부 미팅이 좀 길었어."

강인호가 자기 자리로 가면서 코트를 벗었다. 말은 자연스러웠다. 목소리도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나 이겸은 강인호의 시선이 잠깐 이겸의 책상 위를 지나쳤다는 걸 느꼈다. 수첩이 놓인 방향이었다. 0.5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겸의 등 쪽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강인호는 서랍을 열었다. 무언가를 넣는 소리가 났다. 이겸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수첩 위에 손을 얹었다. 손등이 보이도록. 아무렇지 않은 동작처럼 보이게. 손바닥 아래로 수첩 표지의 거친 질감이 느껴졌다. 이겸은 그 감촉을 확인하듯 한 번 눌렀다.

해진이 탕비실 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이겸과 눈이 마주쳤다. 해진은 잠깐 멈추다가 걸음을 이었다. 탕비실 냉장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물 따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셋이 같은 공간에 있는데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저녁이었다.

"오늘 자료 정리 다 됐어요?"

강인호가 물었다. 이겸을 향한 말이었다.

"네. 이번 주 분은 마무리했습니다."

이겸이 답했다.

강인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키보드 소리가 시작됐다. 규칙적이고 빠른 타이핑이었다. 이겸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모니터를 다시 켰다. 화면에 아무것도 없는 채로.

이겸은 오늘 자신이 둔 선제수를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했다. 민가온의 보고서 제출을 하루 더 막았다. 박재현과 강인호를 연결하는 로그 출력본을 손에 쥐었다. 해진이 이 판 위에 서게 됐다. 세 가지 모두 예전 생에서 없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강인호가 자리를 비운 이유는 아직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이겸의 책상 위를 눈으로 훑었다. 선제수를 뒀다는 것과 상대가 그 수를 모른다는 것은 다른 말이었다. 이겸은 그 차이를 오늘 처음으로 몸으로 느꼈다.

결산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른 하루였다. 이겸은 수첩을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서랍은 소리 없이 닫혔다. 강인호의 타이핑 소리가 계속됐다. 박재현이라는 이름이 심긴 것인지, 실제로 그 손이 거기 닿은 것인지, 아직 한 쪽을 확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인호가 그 과정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은 이제 이겸의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내일 오전까지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이겸은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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