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전이 끝난 날 저녁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안마당에 쌓인 눈이 낮 동안 녹아 질척해진 자리를 용병 막사에서 나온 세라의 부하 두 명이 삽으로 밀어냈다. 화톳불 연기가 낮게 깔렸고, 말 두 마리가 마구간 안에서 번갈아 콧소리를 냈다. 전투가 있었다는 흔적은 성벽 동북쪽 귀퉁이에 남은 그을음과, 용병 막사 처마 아래 가지런히 세워 놓은 부러진 창대 세 자루뿐이었다. 엘리안은 그 창대들을 지나치면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세어 봤자 숫자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이 먼저 움직였다.
마구간 쪽에서 바람이 한 번 돌았다. 젖은 짚과 쇠 냄새가 섞인 공기였다. 엘리안은 갑옷을 벗은 자리에 아직 어깨 근육이 뻐근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그제야 느꼈다. 오른쪽 손목 안쪽에는 방패 끈이 쓸고 간 자국이 붉게 올라와 있었다. 치료할 만한 상처는 아니었다. 그냥 남겨 두기로 했다.
접견방 쪽 복도 끝에서 하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촛대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평소보다 반 뼘쯤 낮아 보였다. 어깨가 아니라 등이 그랬다. 엘리안이 다가가자 하르트는 아무 말 없이 방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저녁 자리라고 부르기엔 초라했다. 탁자 위에는 식어 가는 보리 죽 두 그릇과 소금에 절인 생선 한 토막, 그리고 양초 두 자루가 전부였다. 군량 창고에서 꺼낼 수 있는 최선이 이 정도라는 것을 엘리안도, 하르트도 알고 있었다. 하르트가 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죽 그릇을 한쪽으로 밀었다. 먹으러 온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발주처 이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르트의 목소리가 낮았다. 낮은 게 아니라 가라앉아 있었다. 엘리안은 의자에 앉지 않고 탁자 끝에 손을 짚었다.
"들겠습니다."
"베도르 상단."
하르트가 짧게 말했다.
"십이 년 전에는 그 이름이었습니다. 지금은 공작가 직할 교역국으로 편입됐지만, 당시 납품 계약서에는 베도르 상단이라고 찍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 이름을 보고도 어떤 상단인지 몰랐습니다. 군량 납품이 많았던 시절이라 이름이 하나 더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요."
엘리안은 손을 천천히 탁자에서 뗐다. 양초 하나가 바람도 없는데 한 번 흔들렸다가 돌아왔다.
"몰랐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아십니까."
하르트가 대답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길었다. 촛불 그림자가 천장에서 흔들렸다. 노인의 손이 탁자 위에 놓인 채 미동도 없었는데,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인 손등이 촛불 아래서 유독 늙어 보였다.
"압니다."
하르트가 말했다.
"베도르 상단이 군량 경로를 쥐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경로가 우리 영지를 거쳐 갔다는 것을. 당신 아버지가 그것을 알았는지는 모릅니다. 알았다면 달리 행동하셨을 수도 있고, 몰랐다면 그냥 이용당한 겁니다."
엘리안은 그 말을 한 번 더 삼켰다. 이용당한 것과 공모한 것 사이의 거리. 아버지가 어느 쪽이었는지는 지금 당장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 않은 기분도 조금 섞여 있었다. 그것이 두려움인지 체념인지는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문서는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말이 없었다. 엘리안은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계약서의 귀퉁이가 접혀 있었다. 하르트가 그것을 보면서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삼킨 것 같은 침묵이었다. 엘리안은 그 침묵을 건드리지 않았다.
"루키안이 라이든에서 돌아오면,"
엘리안이 말했다.
"이 이름이 그쪽에서도 나올 겁니다."
하르트가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서 또렷하게 들렸다. 노인은 죽 그릇을 다시 제자리로 밀어 놓고 말했다.
"드셔야 합니다. 오늘 제법 뛰셨으니까요."
엘리안은 죽 그릇을 바라봤다. 이미 식어서 표면이 굳어 있었다. 그래도 숟가락을 들었다.
하르트가 나간 뒤 방은 더 조용해졌다. 촛불 두 자루가 서로 다른 속도로 타들어 갔다. 엘리안은 죽을 반쯤 먹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봉투를 다시 꺼냈다. 계약서를 펼치지는 않았다. 펼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베도르 상단. 그 이름이 십이 년 전 이 영지의 창고를 통과했고, 그 창고가 지금 반쯤 비어 있는 채로 자신 앞에 있었다. 연결의 끝이 어디인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실이 있다는 것은 이제 알았다.
세라가 찾아온 것은 하르트가 나간 지 한 시간쯤 뒤였다.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냥 열었는데, 엘리안이 뭐라 하기도 전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면서 말했다.
"오늘 후위조 타이밍, 일부러 맞췄죠."
"맞췄습니다."
"그거 물어보러 온 게 아닙니다."
세라가 팔짱을 꼈다.
"이 주가 지나면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러 왔습니다."
엘리안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 주가 지나면 루키안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 우리가 가진 패가 얼마나 두꺼운지 다시 셉니다."
"패."
세라가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렸다.
"나는 패를 세는 사람이 아닙니다. 땅에 서 있는 사람이에요."
"압니다."
"그러니까 물어보는 겁니다. 이 영지가 서 있을 땅이 있는지."
엘리안이 세라를 봤다. 용병단장의 눈이 오늘 전투 이전보다 조금 달라져 있었다. 계산이 아니라 무게를 재는 눈이었다. 오늘 성벽 위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먼저 챙기는 엘리안의 선택을 봤을 것이다. 그 눈이 지금 여기서 같은 것을 다시 재고 있었다. 엘리안은 생각보다 빠르게 대답했다.
"있습니다. 지금은 얇습니다. 하지만 서 있을 수는 있어요."
세라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톳불 소리가 창밖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다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이 주. 그 안에 루키안이 뭘 들고 돌아오는지 보죠. 그다음은 그다음에 이야기합시다."
문 쪽으로 돌아서던 세라가 잠깐 멈췄다. 등을 보인 채로 말했다.
"오늘 부러진 창대 세 자루. 내 부하 것 아닙니다. 어젯밤 성벽 보수 인부들 거예요. 알고 계셨습니까."
엘리안이 대답하기 전에 세라가 먼저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조용했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어 봤던 것이다.
세라가 나가고 방이 다시 좁아졌다. 엘리안은 한동안 촛불을 바라봤다. 베도르 상단. 그 이름이 라이든 쪽 경로와 투창 날의 각인과 이어진다면, 루키안이 확인하고 돌아올 것들의 무게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이 달라지는 순간, 이번 방어전은 단순한 첫 번째 전투가 아니라 누군가가 로벨 영지를 통해 무언가를 통과시키려 했다는 증거의 한 조각이 된다.
엘리안은 봉투를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촛불 하나가 타다 꺼졌다. 남은 하나가 방 안을 좁게 밝혔다. 창고에는 겨울 보리가 남아 있었다. 성벽에는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식은 죽 한 그릇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엘리안은 그것을 다시 들고 끝까지 먹었다. 맛은 없었다. 없어도 상관없었다. 내일 아침에도 이 영지는 서 있어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