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전, 지민은 출력된 메일 한 장을 서린의 책상 위에 놓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통은 요약까지 붙여서 가져오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그냥 내려놓고 커피만 홀짝였다. 서린이 종이를 집어 읽는 동안 지민은 창문 쪽을 바라봤다. 밖에는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민재원 측의 회신이었다. 목요일 오후 두 시 공식 협업 발표 확정. 단 조건은 그대로였다. 강도윤 단독 인터뷰 세션, 아르덴 외부 공간, 별도 일정 조율. 문장은 매끄러웠지만 읽을수록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서린은 종이를 다시 책상에 내려놓고 펜 끝으로 조건 문장 아래를 두 번 두드렸다. 두드리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났다.
"수용하면 목요일 발표 가능. 거부하면?"
서린이 물었다.
"협업 재검토 가능성 있다고 했어요. 직접적으로는 안 썼는데, 전화 통화에서 담당자가 흘렸어요."
지민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이게 진짜 민재원이 원해서인지, 아니면 누가 심어놓은 조건인지."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민이 이미 같은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더 불편했다. 의심이 두 사람 사이에 있으면 그게 사실처럼 무게를 갖기 시작한다. 서린은 종이를 서랍 안에 넣지 않고 그냥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오전 열 시 반, 도윤은 주방에서 올라오지 않았다. 서린이 직접 내려갔다. 1층 주방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문 너머로 칼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빠른 소리였다. 서린은 세 번 두드리고 들어갔다.
도윤은 작업대 앞에 서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채 파 흰 부분을 손질하고 있었는데, 서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칼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셨어요."
말은 짧았다. 시선은 도마 위에 있었다. 주방 안에는 육수 냄새가 낮게 깔려 있었고, 창가 쪽 선반 위 타이머가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민재원 측 회신 왔어요."
서린이 종이를 내밀었다.
"조건 그대로예요."
도윤이 그제야 칼을 내려놓고 종이를 받아 읽었다. 다 읽고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앞치마 자락으로 손을 닦고 종이를 작업대 위에 놓았다. 잠깐 창문 쪽을 봤다. 1층 주방 창문은 외벽 절반이 땅 아래라 빗물이 유리 아래쪽에 고여 있었다. 도윤의 손가락이 종이 모서리 위에 잠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할게요."
도윤이 말했다.
서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예상한 말이 예상보다 빠르게 오면 이상하게 준비가 안 된다. 서린은 도윤의 얼굴을 보는 대신 작업대 위 종이를 봤다.
"아르덴 이름 없이 나가는 자리예요."
서린이 말했다.
"단독 세션이라는 건, 맥락이 당신 혼자가 된다는 거고."
"알아요."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민재원이 원한다면 자리는 나가되, 아르덴 얘기 먼저 꺼낼 수 있어요. 조율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조율이 가능한 상대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예요."
도윤이 잠깐 서린을 봤다. 무언가를 재는 표정이었다.
"배성재 쪽이랑 연결됐다고 보는 거죠?"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종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도윤이 먼저 말했다는 게, 이 사람이 이미 그 가능성을 알고 있다는 뜻인지 아닌지를 한 번에 판단할 수 없었다. 그게 더 피곤한 부분이었다. 알고 있어서 먼저 말하는 건지, 모르기 때문에 먼저 말하는 건지. 둘은 결과가 같아도 의미가 달랐다.
"저 배성재 문자 두 번 다 먼저 말씀드렸잖아요."
도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방어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냥 확인하는 것 같았다.
"알아요."
서린이 말했다.
"그래서 더 모르겠어요."
도윤이 조용히 웃었다. 짧은 웃음이었는데 씁쓸한 구석이 있었다.
"저도 그런 말 들을 때가 있어요. 너무 잘해줘도 의심받는다고."
그러고는 바로 작업대 앞으로 돌아서며 덧붙였다.
"목요일 전에 민재원이랑 직접 얘기해 볼게요. 조건 조율 여지가 있는지 먼저 떠보고, 결과는 바로 알려드릴게요."
서린은 그 등을 잠깐 봤다. 앞치마 끈이 한쪽이 살짝 풀려 있었다. 말해줄까 하다가 하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이 대화가 다른 온도로 바뀔 것 같았다. 서린은 그냥 주방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타이머 소리가 문 너머로 다시 들렸다. 규칙적이고 작은 소리였다. 서린은 계단 앞에서 한 번 멈췄다가 올라갔다.
오후, 소희가 연회장에서 화환 정리를 하고 있었다. 서린이 지나가다 잠깐 멈췄다. 이번 주 금요일 행사 준비였다. 소희는 국화를 한 송이씩 고르며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서린이 들어오는 소리에 돌아봤다.
"도윤 씨 오늘 주방 꽤 오래 있던데."
소희가 말했다. 서린에게 물어보는 건지 혼잣말인지 모호한 어조였다.
"메뉴 테스트 중이에요."
"그게 다예요?"
소희가 화환에서 시든 잎 하나를 뽑아내며 물었다. 손은 꽃에 있고 시선만 서린 쪽으로 왔다.
"무슨 말이에요."
"그냥요."
소희가 다시 꽃을 봤다.
"예전에 도윤 씨, 뭔가 결정할 때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근데 요즘은 계속 먼저 말하잖아요. 그게 달라진 건지, 아니면 달라진 척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희가 알고 있는 도윤의 과거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지금 이 말이 경고인지 관찰인지, 그것도 바로 알 수 없었다. 연회장 창문으로 빗소리가 낮게 들어왔다. 소희는 국화 한 송이를 더 골라 자리에 꽂고는 뒤로 물러서서 균형을 확인했다. 서린은 그 옆에 서서 같이 화환을 봤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많은 말 같았다.
저녁 일곱 시, 지민이 퇴근하면서 사무실 문에 기댔다.
"목요일 조건 어떻게 할 거예요?"
"도윤 씨가 직접 민재원이랑 얘기해 보겠다고 했어요."
지민이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
"도윤 씨가 먼저요?"
"먼저요."
지민은 잠시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그냥 가방을 들었다.
"저 그 사람 믿어요, 서린 씨. 근데 서린 씨가 못 믿으면 저도 어렵거든요. 그러니까 그거 좀 정해줘요."
그러고는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서린은 불 꺼진 모니터를 보다가 커피잔을 들었다. 완전히 식어 있었다. 마시지 않고 내려놓았다. 창밖은 여전히 비였다. 오전부터 내내 같은 강도로 내리는 비였다. 세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는.
도윤이 오늘 민재원에게 직접 연락한다고 했다. 서린을 거치지 않고. 그게 믿음을 보여주는 방식인지, 아니면 이미 자기 방식으로 판을 움직이려는 것인지, 서린은 오늘 밤 안에 답을 낼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도윤의 말이 지금 서린의 판단보다 조금 앞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간격이 오늘 처음 생긴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서린은 식은 커피잔을 창가 쪽으로 밀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도윤이 먼저 말해올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기다리는 쪽이 항상 한 발 늦는다.